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신문연재글) 88

어머니의 족두리/ 이시은

어머니의 족두리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활옷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있는 신부의 사진을 보고 있다. 사십 년 전 폐백을 올리기 위한 나의 모습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사진이다. 앨범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잊고 있던 모습을 다시 보니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족두리를 쓰고 폐백을 드리는 것은 시댁 사람들과 나누는 첫 번째 인사며, 가족으로 만나는 예식이다. 저 족두리를 쓰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어깨에 짐을 진 것 같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 다른 가문에 며느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일인가. 결혼 일자를 잡아두고 결혼식 날까지 그런 생각에 잠을 설쳤다. 그때를 생각하면 요즈음 젊은이들의 결혼 일자를 몇 개월 전에 잡는 것을 보면서, 지금처럼 기일이 길어..

양귀비꽃과 양귀비 / 이시은

양귀비꽃과 楊貴妃양귀비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흐드러지게 양귀비꽃이 피었던 자리에 코스모스가 무성히 지라 꽃을 피우고 있다. 오뉴월 선홍빛 화려한 꽃물결로 시선을 끌던 자리에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다시 코스모스 꽃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양귀비는 마약 초로 재배가 금지되어 있어 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 수년 전 제주도에 들러 가파도에 갔을 때다. 보리를 베어낸 길가에 유달리 아름답게 느껴지던 붉은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어디서 본 듯 한데 꽃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궁금하여 일행에게 물어보고서야 그 꽃이 관상용으로 마약 성분이 없는 꽃양귀비인 것을 알았다. 그제야 오래전 중국 낙양에서 양귀비꽃을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약 성분이 있는 양귀비꽃은 꽃잎이 많으며, 꽃잎의 끝이 톱니 모양으로 생..

어머니의 베 버선 / 이시은

어머니의 베 버선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버선의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베틀로 짠 무명베 버선이다. 아직도 켤레를 묶은 실을 따지도 않은 상태이지만 누르스름하게 변한 색깔이 버선의 연륜을 짐작하게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서너 해 전 친정에 갔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아 온 버선이다. 어머니께서 시집올 때 외가댁에서 혼수품으로 가져와 여태 남아 있는 물건 중 하나이다. 어머니는 연세가 들어 남은 여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느끼시면서부터, 내가 친정에 가 있는 동안 가끔 어머니의 혼수를 넣어 왔던 함을 내려놓고 뒤적이기를 좋아하셨다. 그 함 속에는 구십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세월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듯했다. 혼수로 가져와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하고 있던 발 고운 명주 필로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

양귀비꽃과 양귀비/ 이시은

양귀비꽃과 楊貴妃양귀비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흐드러지게 양귀비꽃이 피었던 자리에 코스모스가 무성히 지라 꽃을 피우고 있다. 오뉴월 선홍빛 화려한 꽃물결로 시선을 끌던 자리에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다시 코스모스 꽃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양귀비는 마약 초로 재배가 금지되어 있어 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 수년 전 제주도에 들러 가파도에 갔을 때다. 보리를 베어낸 길가에 유달리 아름답게 느껴지던 붉은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어디서 본 듯 한데 꽃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궁금하여 일행에게 물어보고서야 그 꽃이 관상용으로 마약 성분이 없는 꽃양귀비인 것을 알았다. 그제야 오래전 중국 낙양에서 양귀비꽃을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약 성분이 있는 양귀비꽃은 꽃잎이 많으며, 꽃잎의 끝이 톱니 모양으로 생..

세월을 새긴 정자나무 / 이시은

세월을 새긴 정자나무 이시은 (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무더위에 숨이 막히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낮에는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우리만큼 강렬한 햇볕이다. 더위를 피하려고 에어컨을 켜놓고 있으면 그 또한 몸이 개운하지 않다. 코로나 변종 델타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어 외출을 자제하다 보니 갑갑하기 이를 데 없다. 해가 기울기를 기다려 공원으로 향했다. 도심의 공원에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걷기 운동을 하거나 바람을 쐬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몇 바퀴를 돌고 나무 아래 앉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잎이 무성하게 달린 느티나무다. 제법 바람이 이는 저녁이라 잎새들이 쉴새 없이 나부낀다. 바람을 나르는 느티나무는 고향 마을 어귀에 서 있던 같은 수종의 정자나무를 ..

세월을 새긴 정자나무 / 이시은

세월을 새긴 정자나무 이시은 (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무더위에 숨이 막히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낮에는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우리만큼 강렬한 햇볕이다. 더위를 피하려고 에어컨을 켜놓고 있으면 그 또한 몸이 개운하지 않다. 코로나 변종 델타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어 외출을 자제하다 보니 갑갑하기 이를 데 없다. 해가 기울기를 기다려 공원으로 향했다. 도심의 공원에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걷기 운동을 하거나 바람을 쐬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몇 바퀴를 돌고 나무 아래 앉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잎이 무성하게 달린 느티나무다. 제법 바람이 이는 저녁이라 잎새들이 쉴새 없이 나부낀다. 바람을 나르는 느티나무는 고향 마을 어귀에 서 있던 같은 수종의 정자나무를 ..

로열 셀랑고르 비지터 센터 방문 / 이시은

로열 셀랑고르 비지터 센터 (Royal Selangor visitor Center)방문 이시은( 시인. 청하문학 고문) 은은한 빛깔의 액자가 가족사진을 담고 있다. 세공한 문양이 좋아 먼지를 닦을 때마다 눈여겨보곤 하던 주석으로 만든 액자이다. 오래전 아이들의 사진을 넣으려고 사 온 것이다. 주석액자를 바라보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들렸던 로열 셀랑고르 비지터 센터(Royal Selangor visitor Center)를 떠올린다. 쿠알라룸푸르의 관광명소이기도 한 이곳은 유명한 주석 공예공장이다. 주석은 전도성과 유연성이 좋은 은색 광물로 말레이시아의 주요 생산물이다. 19세기 후반 주석이 많이 나는 말레이시아가 영국령으로 있을 때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 주석 공예공장을 ..

回生회생의 기쁨 / 이시은

回生회생의 기쁨 / 이시은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연록의 물결이 출렁인다. 겨우내 삭막한 풍경은 사라지고 한바탕 봄꽃들이 축제를 끝낸 나무들은 모두 새움을 틔워 하루가 다르게 잎새를 키우고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하고 즐겁다.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창가 목련나뭇가지에 꽃눈이 맺히기를 기다린다. 목련이 연미색 꽃잎을 피워 올리면, 어김없이 뒤뜰의 살구나무도 꽃눈을 맺고 목련을 따라 꽃을 피운다. 해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창가의 꽃들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행복하다. 일상이 자유롭지 못한 지난겨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답답함이 쌓여 더욱 봄을 기다리게 했다. 다른 해와 같이 앞뜰의 목련나무는 풍성하고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찾아왔지만, 뒤뜰의 살구나무는 죽은 듯이 서있다. 겨우 잔가지 ..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시은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바람은 차갑지만, 햇살은 어느새 조금씩 변화를 느끼게 한다. 雨水우수는 ‘눈이 물로 바뀐다’는 뜻이고“우수 경칩이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고 하였으니 한두 번의 꽃샘추위가 시샘을 부려보아도 봄은 어느새 준비를 하고 다가오고 있음이다. 어느 해보다 밝은 햇살 아래 피어나는 꽃들과 새순이 기지개를 켜고 돋아나는 날이 기다려진다. 올해 겨울은 추위보다 마음의 냉기가 더 혹독했던 해였다. 코로나로 일상이 무너진 지도 해를 넘겨 힘겨웠으니, 꽃 피고 잎 돋는 화창한 봄이 더욱 기다려지나 보다. 봄꽃을 보기에는 철 이른 어느 날, 잔설이 남아있는 산길에서 눈 속에 노랗게 꽃을 피운 복수초를 보고 기뻐하던 생각이 난다. 겨울에 볼 수 있는 꽃으로 동백꽃이 있겠지만, ..

코로나로 지친 한 해를 보내며 / 이시은

코로나로 지친 한 해를 보내며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보신각 재야의 종소리를 들은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새해를 맞이한다. 올해는 코로나로 67년 만에 타종 행사도 취소되었다. 매번 찾아오는 연말이고 새해이지만, 유난히도 어려운 한 해를 보냈다. 우한에서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만 해도 이토록 온 세계가 코로나에 휩쓸려 혼란스러울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엄청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대전 때보다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무기 없는 전장이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코로나의 발병이 늘어나, 의료진들은 지칠 대로 지쳤고, 병상이 모자라 입원을 할 수 없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수시로 확진자를 알리는 문자메시지가 날아든다. 모임들이 취소되고 지인의 길 흉사에도 참석을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