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새긴 정자나무
이시은 (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무더위에 숨이 막히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낮에는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우리만큼 강렬한 햇볕이다. 더위를 피하려고 에어컨을 켜놓고 있으면 그 또한 몸이 개운하지 않다. 코로나 변종 델타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어 외출을 자제하다 보니 갑갑하기 이를 데 없다.
해가 기울기를 기다려 공원으로 향했다. 도심의 공원에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걷기 운동을 하거나 바람을 쐬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몇 바퀴를 돌고 나무 아래 앉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잎이 무성하게 달린 느티나무다. 제법 바람이 이는 저녁이라 잎새들이 쉴새 없이 나부낀다. 바람을 나르는 느티나무는 고향 마을 어귀에 서 있던 같은 수종의 정자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두 아름이 넘는 이 나무는 내가 젖먹이 때부터 나를 보아왔을 터라, 나의 성장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코흘리개 시절 기억으로는, 또래와 어울려 공기놀이를 하고 숨바꼭질하던 때와 집에 손님이 오셨다가 가는 길에, 가족들이 가시는 손님을 전송하러 나가서 마을 밖으로 나서는 손님과 작별을 하던 장소였다.
정낭걸이라 불리던 이곳에는 당산제를 지내고 새끼줄에 오색천을 달아놓는 얼마간의 기간 외에는 언제나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사람들이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넓고 깊은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 아래는 많은 사람이 모여 놀 수 있는 마을의 쉼터였다.
어린 우리는 신나게 놀았고, 먹을 것을 들고나와 나누어 먹는 어른들은 우리를 챙겨 먹였다. 요즈음처럼 더운 날씨에는 들일을 하고 온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나와 단잠을 자고 오후 일을 하기 위해 충전을 하기도 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져 마을의 소식들이 전해지고, 마을 일들을 의논하는 만남의 장소였다. 삼복더위를 이기는 방법이라야 부채가 전부였던 그 시절, 탁 트인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더위를 식혀주던 정자나무야말로 마을 사람 누구에게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어른들을 따라가거나 친구들을 만나 놀기도 하던 놀이터는 까마득히 잊혀져 있었다. 친정에 갈 때면 차로 집까지 갔다 돌아오곤 하였으니, 정자나무를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정자나무가 서 있는 길을 걸어 동구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던 때와는 달리, 새로 닦여진 길을 따라 자동차가 오간다. 부채를 대신해 에어컨이 더위를 식혀주는 지금은 마을의 풍경도 변했다. 마을회관이 세워져 쉼터와 놀이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번듯한 집을 지어 냉 온방을 하여 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는 요즈음은, 그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편리하고 편안한 쉼터이다. 갈수록 각박해지고 개인주의가 되어가는 시대에 새로운 쉼터에서도 정자나무 아래서 마을 사람들이 나누던 정과 훈훈함이 이어지면 한다.
그 누구보다 오래 마을을 지키며 수많은 마을의 사연과 추억들이 새겨져 있는 정자나무다. 이제는 뒤로 밀려나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할 것 같아 정자나무의 근황이 더욱 궁금해지고 아련한 기억이 소중해진다.
내 나이만큼 세월을 보태어 안고 있는 정자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에 올케에게 나무의 근황을 물었다. 아직도 싱싱하게 나뭇잎이 무성하다는 말에 마음이 후련하다. 나무 아래 자리에 앉혀 놓으면, 꼬물대며 놀던 내가 칠순을 바라보는 세월이 흘렀다. 혹시 나무의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를 거두었다. 여기저기 예전 같지 않은 몸을 생각하며 만년을 살 것 같이 살아왔건만, 늙고 늙은 고목보다 못함을 생각하며, ‘한평생 잠시다’라고 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을 새삼 떠올린다. 정자나무의 수령을 모른다고 하시던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신 지 반백 년이 지났고, 어린 우리를 살펴주시던 어른들도 세상을 등지셨다.
느티나무 아래서 기억을 더듬으며 오래도록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앉아 있는 하늘에는 유달리 커 보이는 보름달이 내려다보고 있다. 정자나무 아래서 바라보던 달밤은, 논배미의 구불구불한 유선을 더욱 운치 있게 하였고, 산자락에 둘러싸인 마을은 음영의 아름다움으로 정겹고 신비로운 밤 풍경이었다.
하나둘 그리움이 묻어나는 가슴에, 공원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가 느티나무 아래 모여 놀던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여름밤이 달빛에 젖는다.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2021. 8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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