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상자 속의 유년의 집
이시은(시인. 수필가)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면 나의 성장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산촌에서 유년을 보낸 내게는 자연은 친구였다. 대가족 속에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갖가지 놀이를 하며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았다. 지금도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 그 즐거움 속에는 글을 알고부터 손에 닿는 대로 읽어대던 책과의 만남도 자리하고 있다.
내가 자란 고향 집은 밀양 시내에서 40여 리 떨어진 곳이며, 밀양에서 부산. 마산으로 향하는 국도까지 버스를 타러 가려면 5리를 넘게 걸어가야 하는 산촌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다. 방학이면 서울에서 사촌들이 내려와 개학을 앞두고 갔으며, 농사 일을 하는 일꾼 서너 명과 찾아드는 손님들로 언제나 집안은 북적거렸다. 정미소를 운영하여 하루 종일 방아 찧는 기계 소리가 마을 입구에서 집안까지 들리기도 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일 년에 소금 석 섬을 먹으면 다른 건 얼마나 먹느냐”고 하셨다니 짐작이 간다.
고향 집은 마을 한가운데로 올라가는 큰길을 따라 가장 안쪽 산자락이 흘러내린 끝에 있어, 집에 앉아서 바라보면 야트막한 산자락이 좌우로 집을 감싸고 있다.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저만큼 흐르는 시내를 안고 누운 산등성이가 있어, 집안 어디에서나 산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동남향 안채에는 숲을 통과한 눈부신 빛줄기가 찾아들어 황홀하고 아름다운 느낌으로 가슴을 설레며 하루를 시작했다.
해가 중천으로 솟아올라 더위를 더하는 대낮에는 바깥마당에 있는 수령을 모른다는 회화나무 그늘에 놓인 평상에서 소꿉놀이를 하다가,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 서산 머리에 다다를 때쯤에는 고추잠자리를 따라 마당을 휘저어 다니며 웃음꽃을 피웠다.
저녁을 먹고 평상에 누워 모깃불의 매큼한 냄새를 맡으며 할머니께서 모기를 쫓아주던 부채 바람을 쐬며 누워서 바라보는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쏟아져 내렸고, 뒷산에서는 우-우-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었다. 늑대가 개를 닮은 무서운 짐승이라는 말을 들어도 가족들이 곁에 있어 무섭지도 않았다.
고향 마을은 삼십여 호가 넘었으나 유독 우리 집은 산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안채에서 마주하는 왕솔나무 숲 사이로 아침 해가 눈 부신 빛줄기로 찾아 들고, 소나무 숲 끝자락에 일렬로 선 굴참나무는 계절의 변화를 가져와 사계절을 만끽하게 했다. 달빛이라도 젖어 드는 밤에는 산 그림자를 깔고 앉은 음영의 은은함은 한 폭의 수묵화로 다가섰다. 달빛으로 창호 문에 그려지던 댓잎의 하늘거림과 바람결에 묻어오는 대밭의 사각이는 속삭임은 미래에 대한 꿈과 그리움을 안겨주었다.
학창시절 휴일이나 방학 때 집을 찾는 날이면 외투를 둘러쓰고 집 주변을 거닐곤 했다. 지금도 친정에 갈 때면 나를 불러내어 슬그머니 혼자 나서게 하는 바람으로 찾아온다.
문득문득 별이 쏟아지는 밤이 그립고 달빛이 요요한 밤이 그립다. 그럴 때면 마음은 고향 집으로 달려가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별빛을 만난다.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동화 속의 백설 공주도 되어보고 어린 왕자도 되어본다. 짓누르던 중압감도 외롭고 쓸쓸하던 마음도 사라지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유년의 내가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여행하며 꿈을 꾸고 있다.
늑대 우는 소리가 들리던 캄캄한 밤도 무섭지 않게 지켜주시던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계시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내가 어렵고 힘들 때면 생각나는 분들이고 나를 지켜주고 계신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대로이다.
눈이 매울세라 모깃불의 연기를 부채로 날려 보내며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도란도란 피어난다. 밤이면 우-우-우- 하고 산촌의 적막을 깨던 늑대 울음소리마저 그리움으로 다가서는 못 말리는 나의 추억 여행이지만, 그 시간은 언제나 내게 번잡하고 고뇌스러운 일상의 피난처가 되어주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유년 시절을 혼자 보는 보물 상자에 담아두고 꺼내본다.
창밖에는 펄펄 눈이 내리고 정원수는 눈꽃을 피우고 섰다. 단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눈 앞에 펼쳐지는 새하얀 눈으로 덮인 백설의 세상이 신기하던 유년의 고향 집이 그립다. 내 머리에도 서리가 내리고 창밖의 풍경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건만, 눈 덮인 풍경은 고향 집 장독대와 흙담 벽에 쌓인 눈을 보는듯하다. 그 시절 나는 자연과 더불어 자라며 별빛과 달빛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꿈을 키웠다. 유년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행복 했던 날들이 내가 글을 쓰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키울 수 있는 텃밭이었다.
한국문학신문<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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