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머무는 고향
이시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그곳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오랜 타향 생활에서 힘겨울 때면 지친 모습으로 찾아드는 마지막 길목에는 언제나 유년의 세월을 살찌우던 고향이 펼쳐진다. 보리밭 이랑에 봄바람이 스치고 살구꽃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피어날 때면, 나는 마을 뒷동산 바위에 앉아 놀곤 했다. 따스한 햇볕을 즐기며 내려다 보는 마을에는 닭 우는 소리와, 누렁이의 졸음 섞인 울음 소리만 정적을 깨는 한가롭기 그지없는 산촌이었다.
세상 살이가 어려워질수록 아름다운 고향이 있어, 고단한 삶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소중함을 더해 간다. 사 계절이 뚜렷한 덕분으로 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마을의 풍경은, 특별히 놀잇감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신이 내려 준 놀이터였다.
봄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바구니를 끼고 논두렁과 밭 기슭을 헤매며 쑥을 캤다. 과시욕이 넘치는 요즈음의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알던 우리들은 쑥을 꼭꼭 눌러 담은 바구니를 내밀며 서로가 적게 캐었다며 내숭을 떨곤 했다.
그리고는 이내 깔깔대며 적게 캔 친구에게 한 움큼씩 나누어 주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냇물에 체온을 빼앗겨 입술이 파리해 지면, 햇볕에 달궈진 자갈밭에 올라가 몸을 데웠다. 저만큼 소를 몰고 지나가는 머슴아이의 발걸음엔 수줍음이 담겨 있었고, 힐긋힐긋 바라보는 눈길에는 호기심이 살아 있었다. 한줄기 비가 지나간 후에 불어난 개울에서 물길을 따라 떠내려가며 동동거리고 헤엄을 치는 즐거움은, 수영장에서 줄을 맞추어 헤엄을 치는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여름철이면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향했다. 내 추억의 단편 이나마 전해 주고 싶어 물놀이 기구를 들려주며 개울에서 여름을 즐기게 했다. 내가 어릴 때 그러했듯이, 아이들은 외사촌들과 이종사촌들이 함께 어울려 즐겁기 그지없어 보였다. 물장구를 치고 두 손으로 서로에게 물세례를 보내며 놀다 지치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영복을 입은 채 외갓집으로 향했다. 줄줄이 뛰어든 아이들은 수영복을 수북히 벗어낸다. 그리고는 세탁기에 탈수한 수영복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갈아입고 개울가를 오가며 잠자리도 잡고, 미꾸라지도 잡으며 시골 풍경에 젖었다. 아이들이 살며시 돌멩이를 뒤집으며 미꾸라지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모습에서 어릴 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고향이라고 지칭하기에는 너무도 삭막한 도심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소중했던 내 유년의 일부라도 전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을까. 삶의 여정에서 괴로울 때면 내게 안식처로 자리했던 외갓집 풍경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 어떤 행위보다 탁월한 서정의 진가를 발할 것이다.
노오란 벼이삭이 고개 숙인 논두렁을 따라 가을이 영글어 간다. 나무 심기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심어놓은 감나무 밭에서 홍시를 따는 일은 즐거움을 더한다. 세상 구경하듯 잎새 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살들의 인사를 받으며 감을 따는 날에는, 머슴들과 가족들의 손길이 분주해 진다. 만여 평이 넘는 잘 가꾸어진 단감밭보다 잡풀이 무성한 그 감밭이 더욱 소중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때 묻지 않은 영혼을 키워가던 추억 때문이다.
벼 베기가 시작되면 논 자락에는 낟가리가 생겨난다. 집 마당에도 집채보다 높다란 낟가리가 쌓이고, 힘 좋은 누룽이도 기력이 부치도록 달구지를 끌어야만 했다. 낟가리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마당에서 볏단을 던져 올리면, 위에서 볏단을 받아 쌓아가는 정교한 모습을 묘기를 보듯 바라보았다. 내심 야무지게 마음먹고 힘주어 볏단을 던져 보았지만, 힘이 부치어선지 이내 펄썩 땅 바닥으로 내 동댕이쳐지기 일쑤였다. 그 때는 아무런 미련없이 볏단을 버려 둔 채, 폴짝 폴짝 친구를 찾아 대문 밖을 나서고 말았다. 작은 실수쯤은 아무렇지않게 보아주던 그 때가 그리워진다.
보리 파종을 끝낸 늦가을, 새벽부터 시작되는 탈곡기 소리와 함께 황금색 벼 알이 마당 가득 쌓여 간다. 이렇듯 풍요로운 고향의 가을은 I. M. F를 경험하는 요즈음엔 더 한층 아른대는 계절이다.
겨울밤에는 가족들과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에 묻혀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었다.
안채에서 바라다 보이는 소나무 숲과, 빈 마당에 흐르는 달빛에 이끌려, 코트 깃을 세우고 집 뒤 오솔길을 걷곤 했다. 달빛은 산자락의 음영과 마을의 초가 지붕이 함께 어우러져 신비함을 더했고, 가슴 밑바닥은 가라앉은 어떤 그리움을 자아내게 했다. 그것은 내가 도심의 전깃불 아래서 달빛의 고적함을 애써 그려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탯줄처럼 이어진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사라질 때는 질긴 삶의 막을 내릴 때일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봉래호에 불빛이 환하게 밝혀졌다. 주름진 얼굴에 손수건을 적시며 고향 땅에 가고싶다고 하는,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의 눈물을 본다. 진정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아픔으로 자리한 가슴은, 몇 줄의 수식어로는 표현되지 않을 것이다. 생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아직도 웃으며 반겨주는 부모님이 계신 삶의 원천인 고향이 있음은 행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진정 혼자임을 깨달을 때면 언제나 고향은 내 곁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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