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저녁 식탁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13. 8. 29. 16:59

 

 

 저녁 식탁

                                                     이시은


 

  혼자 앉은 식탁에는 늘 기다림이 함께 한다.
  새벽 5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에 깨어나  아침 준비가 시작된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나른함이 온 몸으로 퍼져간다.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열이 있는가 싶더니 급기야 심한 몸살 기운으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출근하려던 남편은 밥도 먹지 못하고 누워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는 오늘은 일찍 귀가하겠다고 했다.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집안 일이며 내가 하고있는 바깥 일까지 겹쳐 피곤함에 젖어있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나  보다. 오늘은 저녁 식탁에 동참할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저녁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남편은 여느 때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반찬을 꺼내 놓고  식탁에 앉았다. 밥을 물에 말아 보았지만, 까칠한 입맛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혼자 남은 집에는 아픔을 참으며 내쉬는 숨소리만 침묵을 가를 뿐이다. 이른 새벽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도시락 두 개씩을 들고 나간 식탁 한 켠  아이들 자리가 유난히 허전해 보인다. 집안에는 사람소리가 나야 한다던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항상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 고향집에는  식구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어린 손자들이 사랑채에 계시는  할아버지께 저녁 진지  드시라는 전갈을 했고,  큰기침 소리를 신호로 방에  들어서시는 할아버지가 좌정함으로써  시작되는 저녁  모임이었다.


 두렛상에 매달려 있는 어린 코흘리개  동생들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삼촌들까지 온 가족이 방에 둘러 앉았다. 삼대가 정담을 나누는 하루 중 가장 뜻있는 시간이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그 시절 할아버지의 상에  올려진 절인 갈치 한  토막은 어른을 공경하는 표상이기도 했다. 색다른 반찬에 군침을 삼키던 막내까지도 할아버지께서 수저를 드신 후에야 밥을 먹었다.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은연중에 위계 질서가 몸에 젖어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우리들에게 당신의  상에 올려진 별스러운  반찬이 담긴 그릇을 넌즈시 건네주시던 은근한 사랑과 위엄을 은연 중에 남겨 주셨고, 우리 또한 그러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소중히 여기며  자라왔던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의 반찬이 다를  것이 없는 요즈음의 아이들은 그런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간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주축으로 가족들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집안 대소사 일을 의논하며 계획을 세웠다. 어린 우리들은 집안 일을 일러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또한 진지하게 의논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어른들의 올바른 판단을  배울 수가 있었다.  언제나 현실에 접목되는 판단 기준은 보편 타당성에  두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한 후 모자라는 가운데서도 크게 모나지 않게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은 만큼  우리들은 삶의 실체를  느끼면서 자랐다.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판단력과 논리와 규율,  함께 하는 사랑까지 더불어 익힐 수가 있었다.


 새벽 별을 이고 집을 나가 학교에서 학원으로 밤  늦은 시간까지 보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어느 학원의 명강사나, 선전문구가 요란한  그 어떤 학습지가 그토록 유익한 강연을 할 것인가…… 핵가족화 된 요즈음의 우리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상실하고 있다. 입시라는 명분  아래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조차 여의치 않는 아이들이다.


 남편과의 오붓한 저녁식사 시간마저 함께  하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네  식구가 사는 우리집 식탁에도 나 혼자 빈 식탁을 지키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먹다 둔 밥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모처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그이가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뇌리를 스쳐갔다. 이렇게 집에서 편히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을 불평하는 것도 과욕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서운함과 고마움이 심한 갈등을 이루게 된다.


 약 봉지를 비우고 자리에 누웠다. 지난 날 아이들의 얼굴이 휑그런 불빛을 타고 어른거린다. 밥을 짓고 있는 등 뒤에서 작은 손으로 나를 도와주던 아이들이다.  마냥 내 품에만 있을 것 같았던 그들이 자라서 이제는 밥상을 마주할 시간마저 없어졌다.


 벽시계가 열 한시를 알리고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자정이 가까워 돌아온 남편의  손에는 검은 비닐 봉지가 들려 있었다. 미안하다는 듯 불쑥 내민 봉지 속에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멍게가 들어있었다.


 돌아오는 주말이 기다려진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저녁 식탁을 마련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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