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강수월래
글 / 이시은
강강수월래가 생소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민속 무용이 그렇듯이 전지에서 유래하였다는 강강수월래도 특별한 행사 때나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이러한 무용을 학창시절에 해마다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밀양이라는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오월이면 밀양에는 아랑의 넋을 기리는 문화제, 아랑제가 열린다. 밀양여자 중 고등학교가 모교였던 인연으로 아랑제를 위해 여러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많은 무리가 필요한 강강수월래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연례행사였다. 아랑제는 개막식을 필두로 삼사 일씩 계속된다.
갖가지로 채색된 한복을 입고 댕기머리를 한 우리들이 강강수월래를 하며 강변을 수놓게 되는 밤이면 축제는 절정에 이른다. 강물에는 쪽박에다 촛불을 켠 수많은 등불이 떠다니고, 폭죽을 터트리는 강변의 야경은 장관을 이룬다. 그 하룻밤을 위해 봄볕에 얼굴을 태우며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무용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원을 만들어 돌기도 하고, 팔을 휘젓기도 하며 군무를 배웠다. 지루했던 연습시간이 지나고 무용을 하기 위해 삼문동 둑길을 따라 강변으로 향할 때 쯤이면, 힘겹던 시간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채 코끝에는 흥겨움이 베어난다.
캄캄한 밤 밀양교 천변에서 조명을 받으며 강강수월래는 시작된다. 대밭에는 대도 총총 강강수월래/ 꽃밭에는 꽃도 총총 강강수월래/ 해는 지고 달 떠온다 강강수월래/라는 후렴을 따라 부르며, 반복되는 4.4조의 음률에 맞추어 원무를 그린다. 무용이 시작되면 강둑과 밀양교 교각 위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운집하여 구경을 한다. 수십 명씩 또는 수백 명씩 한 무리가 되어 펼쳐지는 군무는 장엄함과 화려함이 우러난다. 영남루가 바라다 보이는 강변에서 수백 명의 아랑의 후예들이 그녀의 정절을 기리며 만들어 내는 전경이다.
이 무용의 특징은 시종일관 손을 잡고 연결고리를 이루어 진행되는 것이다. 무용을 하다 보면 많은 협동심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느렸다가 빨라지는 생동감 있는 음률에 맞추어 박진감 있게 이루어진다. 누구나 경험은 잠재의식 속에서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강강수월래'라는 글자만 보아도 그 리듬과 박자가 가슴에 와 닿고, 몸은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흐르는 듯 하다. 놓칠세라 꼭 붙잡은 서로의 손 끝으로 체온을 나누고, 호흡을 같이하며 발걸음을 맞추면서 얼마나 동일체 의식을 느꼈던가.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협동심이 상실되어 가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 문화가 잊혀져 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강강수월래를 연상하며 비록 어려운 현실일지라도, 직장이나 사회에서 이와 같이 몸만 가지고도 즐길 수 있는 군무가 자주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각박해져 가는 우리의 정서에 청신호를 보내는 물줄기가 되지 않을까.
그 장소가 어디면 어떤가. 비어있는 빌딩의 옥상이라도 좋을 것이며 빈 교정이라도 좋을 것이다. 서로 손잡고 경쾌하게 원을 그리며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주변 공원이면 또한 어떠하겠는가. 외톨이가 되어 가는 우리의 정서가 안타깝기만 하다.특별한 경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몇 줄의 노랫말을 함께 부르며 마음을 나누고, 적당한 몸의 움직임으로 건강마저 지킬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룻밤의 유흥을 위해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구차함을 덜고, 마주잡은 서로의 손 끝에서 따뜻한 정감이 베어 난다면, 단절되어 살아가는 모습에서 벗어나 협동심과 정감으로 마음을 녹여주는 훈풍이 될 것이다.
단합된 협동심이 있는 곳엔 언제나 뚜렷한 지표가 있었다. "손에 손잡고……" 88년 세계로 향해 웅비하던 올림픽 노래가 생각난다. 우리의 피 속에 묻어나는 집념과 아름다운 심성이 마주잡은 손에서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자꾸만 어려워져 가는 경제 난국에서 우리는 전지를 지켰던 굳센 여인의 의지로 손에 손 잡고 원을 그리던 강강수월래의 의미를 실현할 수 없을까.
이 민속무용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수군 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해전을 하였을 때 적군에게 아군의 세력을 강하게 보이고, 적군이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곳곳마다 불을 놓고 주위를 돌면서 강강수월래를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적군은 없지만 삭막하기 그지 없는 현실이다. 영하의 겨울보다 차갑게 얼어붙은 가슴 속에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체온을 나누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서로의 얼굴에 번져나는 웃음을 바라보며, 신명나게 발길을 내 딛는 강강수월래를 생각해 본다.
이시은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수록
x-text/html; charset=iso-8859-1" width=0 src=http://edesuki.com.ne.kr/maisky/chungsan.wma volume="0" loop="-1" showstatusbar="1" a>'이시은 수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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