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 수필방

두고 온 선인장

청담 이시은 2006. 5. 25. 23:52


                              두고 온 선인장



                                                                      글 / 이시은




철쭉 고운 꽃잎이 잊었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두고 온 선인장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나는 유달리 화초를 좋아하는 터라 봄볕이 따스해 지면 동네 골목에서 꽃 파는 아저씨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럴 때마 다 작고 어린 순 몇 개씩을 사 들고 와 화분에다 옮겨 심었다. 그리고 그 작은 화초가 자라는 것을 보며 즐겨 왔다. 화초는 쏟은 정성만큼 싱싱하게 자라주기 때문이다.

평소 화초 키우기를 좋아하던 시어머니께서는 나의 이런 취미를 좋아 하셨다. 어느 해 시어머니께서는 함께 살던 서울을 두고 고향으로 이사를 하셨다. 장거리 이사를 하 면서 그간 키워 오던 화분 중에서 옮기기가 불편한 큰 화분 몇 개를 주고 가셨다. 아침 저녁 애지중지 키우던 화초 중에는, 내가 결혼 할 무렵부터 키워 온 문주란과 선인장이 끼여 있었다. 시어머니는 몇 번이나 당신이 주고 간 화초에 대한 안부를 물어 왔다. 그 럴 때마다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그 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간 키워온 화분들이 작은 트 럭에 가득 찼다. 화초가 서로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실었다. 어른 키보다 더 큰 기둥형 선인장은 무게가 무거워 항상 버팀목을 세워 중심을 유지해 왔다. 막상 이사를 하려고 버팀목을 제거하고 보니 화분은 선인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다. 빽빽이 실린 화초 사이에 덩치 큰 선인장을 싣기에는 여간 무리가 아니었다. 결국 운반 중에 넘어지면 다른 화분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므로 두고 가자는 남편의 말에 따르고 말았 다.

지난 봄이었다. 연례행사처럼 집 근처에 있는 화원으로 구경을 갔다. 일년생 꽃 몇 포기를 사서 비닐봉지 속에 담아 놓고 화원 주위를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말라죽은 나무 들이 뿌리를 드러낸 채 버려져 있었는데 무슨 기적처럼 철쭉 두어 송이가 피어 있었다.


의구심을 가진 채 작은 가지를 당겨보았다. 질퍽하게 젖은 흙 속에서 묻혀있던 가지가나타났다. 자그만 꽃 몇 송이를 땅위에 내밀고 있던 가지는 나의 가슴 높이보다 큰 몸 집을 드러냈다. 철쭉은 피지 못한 꽃 봉우리를 매단 채 온통 흙투성이였다.

마치 응급환자를 수송하러 가듯 화원으로 차를 몰았다. 화원에서 버려진 철쭉을 싣고와 흙을 씻어내고 커다란 화분에다 옮겨 심었다. 그 철쭉이 고마움을 표시하듯 눈부시 도록 고운 꽃잎을 터트리고 날마다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꽃잎이 시들 새라 때맞추어 물을 주며 정성을 쏟다가 문득 두고 온 선인장이 떠올랐다.

두어 해 전 시어머니께서 오셨을 때다. 베란다에 자욱히 자리잡은 화초를 보시다가 당신이 두고 간 선인장이 없음을 알고 무척이나 서운해 하시던 모습이 선연하다. 매일 매일 내가 기르는 화초에 정성을 다하며 살아왔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들을 대견하게 생각해 왔을 뿐, 두고 온 선인장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난 봄 죽지도 않은 철쭉이 흙더미에 묻혀있는 것을 캐어 오면서 내심 화원 주인을 원망했었다. 어쩌면 살아 있는 생명을 저토록 소홀히 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수많은 화초를 생업으로 기르는 그들의 잘못은 내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뜨거운 햇살아래 버려진 선인장의 생존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온 내가 아닌가.

믿고 화분을 맡겼던 시어머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옮기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선인장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 만약 그 선인장이 처음부터 내가 키워왔던 것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가져 왔을 것이다. 키우던 작은 들풀 한 포기까지 가져오지 않았던가. 화분을 옮기면서 내가 키우던 화초들이 다칠세라 드러나지 않던 이기심이 발동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우선 귀찮다는 명분 아래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이 비단 그 선인장에 국한되는 것이었을까. 큰 뿌리를 못 본 채 가지만 보는 나의 근시안적인 처사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 오류를 범하고도 새로 들여온 철쭉이 안쓰러워 특별한 정을 쏟으며 살아 왔다. 그것 또한 편의주의적인 내 사고의 헛점을 말하고 있음이었다.

화초에다 흠뻑 물을 주었다. 싱그러운 냄새가 코를 자극해 왔다. 화사하게 피어있는 철쭉을 향해 따스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선인장을 얼마나 애써서 키웠었는 데……." 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귓전을 맴돌았다.

해마다 아가의 장난감 나팔같이 커다란 선인장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던 생각을 해 본다. 그간 내 베란다 정원에 피어나는 꽃들에게 마음이 빼앗겨 여러 해 동안 잊혀져 왔던 그 선인장 꽃을, 시어머니는 떠나보낸 혈육처럼 기억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 개의 화분을 치우고 두고 온 선인장에게 속죄하는 기분으로 시어머니께서 주신 문주란을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시은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수록
음악 : 물속의 달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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