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자리
이시은
기억 저편에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국제시장을 추억하게 하는 장면이다. 몇 해 전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 관객을 돌파하였다는 보도를 보고 영화관을 찾았다. 스크린에서 흥남부두로 몰려드는 인산인해의 피난민들을 무기마저 버리고 배로 수송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본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절박하기 그지없는 현장에서 어린 덕구가 등에 업고 있던 동생을 밧줄을 타고 배에 오르다 놓쳐 버린다. 그 딸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내린 아버지는 떠나는 배에 오르지 못하고 영영 생이별을 해야만 한다. 동생 이름과 아버지를 부르며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절규하던 어린 덕구의 모습을 보고 눈시울 적시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까?
떠나는 배를 향해 국제시장 꽃분이네 고모를 찾아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아버지. 가족을 구하고자 목숨을 건 아버지와의 이별은 어린 덕구가 가장이 되어 그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야하는 운명의 갈림길 이였다.
사람의 운명은 어느 순간에 뒤바뀌는 것인가 보다. 그 뒤바뀜이 희망적이고 발전적이면 얼마나 좋으련만, 하늘이 무너지는 처참함과 절박함을 당하는 이들의 가슴은 말로 형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담하고 절박할 때 운명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나 보다. 달리 무엇으로 그 기막힌 현실을 감당 할 수 있을까. 운명이라는 말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포기하고, 그 포기함을 위안으로 삼아갈 구실이 운명이라고 치부하는 것보다 더 낳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버지의 보호 속에 살아가야 할 어린 덕구가 가족을 책임져가는 가장이 되어 살아가는 기막힌 현실이 그려지는 국제시장은, 해방 후 전시 물자를 팔고사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자와 밀수품이 거래되며 자리를 잡은 시장이다
국제시장은 일찍이 내게도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내가 부산에서 근무하던 관서가 이곳과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어 수시로 접하던 곳 이었다. 그 시절 만남은 광복동이나 남포동으로 집결되던 시절이라 약속이 있을 때나 물건을 살 일이 있을 때는 국제시장 먹자골목 길을 걸어 나가곤 했었다. 지금은 보기 힘든 고래 고기로부터 빈대떡까지 온통 먹거리로 좌판을 펴고 있는 먹자골목에는, 그 시절 고향을 등지고 바닥인생을 살아야 한 피난민들의 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전에는 해 본 적이 없었다. 6.25전쟁을 격지 않은 세대이고, 내 가족이 겪은 절박함이 묻어있지 않아서 였는 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한 이십대였다.
물론 세월이 까마득히 흐른 후의 국제시장 이었지만, 그들의 애환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국제시장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어디 나만 그랬을까? 전쟁을 치루지 않았던 세대들이 전쟁의 아픔을 생각하고, 가장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목숨을 건 희생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독일광부와 전쟁 중인 베트남에 기술자로 파견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주인공 덕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들 며느리가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간다고 할 때 “우리는 가족 아이가”고 하는 덕수에게 옆구리를 찔러 만류하던 영자(덕구 부인)의 모습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부모에게는 자식의 도리를 하고자 노력하고, 자식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키워야 하며, 보장되지 않는 노후를 바라보면서도 자식에게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골똘히 해야 하는 세대들이 지금 6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나를 위한 인생설계라는 노후대책을 세울 여력조차 없는 인생을 살았다. 자신을 위한 설계란을 두고 살아갈 것이 분명해지는 세대들의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건 삶을 살아갈 것 인지 의문을 가져보는 것은 나의 기우일 것이다. 자신보다 자식을 위해 전력을 다한 세대들이, 오죽 삶이 버겁고, 부모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자식들에게 억울한 생각이 들면 불효소송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하지만 사랑이란 내리사랑이라 천륜이 흐르는 마음이야 어디 가겠는가.
내게는 옷가지를 사거나 옷을 맞추기 위해 옷감을 사러 다니던 국제시장 이었고, 퇴근시간 광복동이나 남포동으로 가는 길에 어울려 먹거리를 즐기던 추억의 거리였다. 그 거리를 생각하며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팔남매 맏이로 칠남매의 자녀를 둔 많은 가솔들이 있는 집에서의 아버지는 늘 무거운 짐 진 마음으로 살아가셨을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아버지께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시던 힘겨움을 알아드리기 보다, 좀 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힘이 되어주시기를 바랬었다. 고향 밀양이 전란에 휩쓸리지 않아 피난을 하거나 터전을 잃지 않아 그토록 절박함을 견뎌야 한 일들은 없었다고 하나, 아버지는 으레히 그렇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해 왔을 뿐, 가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버거운 것인지를 이 나이를 먹고 새삼 생각하는 못난 사람이다.
60-70년 초 그 어려운 시대에 과외 수업까지 할 수 있게 해주신 아버지이며, 은근한 사랑으로 일관하시던 아버지 셨다.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자식을 낳아봐야 안다는 말이 그저 생긴 것이 아니다. 그 시절 보다 살기 좋은 지금 나는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 보다 무엇을 자식에게 더 해주었는지 묻고 싶다. 하물며 부모님께 한 것은 고사하고 자식에게 조차 부모님의 절반도 따르지 못하고 살아왔다.
육십 중반까지 교직에 계시다 퇴임하시고 항상 쓰임새가 많은 집안 살림을 주장하시던 아버지셨기에 몇 푼 안 되는 돈은 어머니에게 쥐어드린 터라, 아버지께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상여에 꽂은 돈이 처음이자 마지막 드린 노자 돈 이었다. 쓰지도 받지도 못하는 돈을 꽂은 꽃상여가 골목길을 나서던 것이, 이토록 아려 오는 아버지에 대한 나의 마지막 인사였다. 부모마음 아는 자식이 없다고 하였던가! 그 무거운 어깨를 헤아리지 못하는 나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던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시간에 어린 손녀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본다 .......’ 덕구가 가르쳐 준 흥남부두를 연유도 모르는 채 불러대고, 아들은 그런 노래를 어린 딸에게 가르쳤다고 핀잔을 준다. 흥남부두에서 난리통에 아버지를 이별하고 생사도 모르는 채 살아온 절절한 한을, 노래에 실어 달래던 아버지의 회한을 헤아리지 조차 못하는 아들이다. 머리가 백발이 된 덕구가 혼자 방에서 아버지의 옷가지를 움켜잡고, 아버지를 부르며 살아오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오열하던 장면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뼈에 사무친 그리움과 힘겨움을 삭이며 살아온 삶을, 자식에게는 말을 못해도, 하소연 할 수 있고 들어 줄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 계시지도 않는 아버지라는 기둥임을 보았다.
한국문학신문'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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