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이시은
동행자가 있다는 것은 사뭇 즐거운 일이다.
날선 추위가 조금 누그러진 입춘을 지나자마자 나의 역마살 기는 발동하기 시작했다. 역마살기가 발동하면 곡히 나와 동행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슬그머니 혼자 발길을 옮겨 놓곤 했었다.
이때 쯤 이면 배낭을 메고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다녀오곤 한다. 혼자 떠나는 여정은 애써 계획을 잡아 그 스케줄을 맞추지 않아도 되어 편하다. 동행자라도 있으면 그 동행자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니, 오가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본시 어울려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지라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단지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없고, 부담 없이 함께 할 사람이 없는 것도 혼자 다니기를 잘 하는 연유이기도 하다. 혼자 떠나던 여행길에 동행자를 얻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차를 몰고 나서면 운전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한가롭게 주변 풍경을 느끼기엔 역부족이다. 예전과는 달리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전국 어디를 가나 웬만한 곳이면 목적지를 가는데 그리 어렵지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차를 몰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을 하는 나와 의견을 같이해 준 동행자가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없다고 하였으나, 정서가 같고 생각이 같은 사람이라면 금상첨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여유롭게 다가오는 풍광을 즐기며 나누는 대화는, 혼자 일 때 보다 함께 해서 더욱 즐겁다는 생각을 안겨주었다.
공주에서 다시 갑사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포장마차에서 추위를 녹일 겸 어묵국물을 나누어 마시며 시골 장터의 정취를 느껴보았다. 터미널에서 어디론가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삶의 모습들을 읽어내기도 하고, 우리 또한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삶 속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의 거울이 되기도 하고, 반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여행에서 느끼는 진 맛이 아닐까!
계룡산 갑사로 향하는 차창가의 풍광은 지난날 고향집에서 읍내로 향하던 시골길을 연상케 했다. 농사가 끝난 빈 들녘에는 바닥을 드러낸 땅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그림처럼 물을 담고 있는 저수지에는, 철새들이 수면 위를 오르내리며 군무를 펼치고 있다. 오늘 이 여정 길에서 내가 집으로 향하듯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저 새들 또한 그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 갈 것이다. 이렇듯 돌아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갑사 주차장은 평일인 탓인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갑사 가는 길에는 해묵은 나무들이 눈길을 끌었다. 고목들이 늘어선 앙상한 가지에 매서운 바람결이 유희를 한다. 이 겨울을 위해 철저히 대비를 해서 일까! 빈 가지들은 바람의 장난에도 의연하기만 하다. 유비무한의 의미를 나무들의 몸짓에서 보았다. 지난 가을 그토록 찬연한 빛깔로 생을 마감하고 흔연스럽게 낙엽이 되어 거름이 되어가는 잎새들이 있었기에, 가벼운 몸으로 바람을 이기고 서 있는 나무들이다. 우리는 당연히 오늘 내가 이렇게 서 있는 줄 알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 낙엽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잊고 살아간다.
일주문을 지나 사열하듯 서 있는 나무들의 행렬을 따라 한참 만에 갑사의 고즈넉한 모습을 마주했다. 스님들은 동안거 중인지 템플스데이에 참석한 듯한 사람 한 둘을 볼 수 있을 뿐 산사의 겨울은 적막하기만 하다.
잔설이 쌓여 있는 겨울 산사는 오랜 세월 풍상을 이기고 서 있는 나무들과 함께 단층마저 희미하게 바래져 고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룡산이 장엄한 기품으로 안고 있는 이곳은, 으뜸이라는 뜻에서 갑사라고 했다고 한다. 최초의 승병700명을 일으켜 청주지방의 왜적을 막았다는 영규대사가 있었던 곳이다. 표충원이 있음을 의아해 했던 우리에게 이곳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그리고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시는 연유를 알게 되었다.
나뭇가지마다 잔설을 이고 있고, 얼어붙은 계곡에는 수정 같은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풍광은 너무도 아름답다. 굳이 말이 없어도 같은 서정을 가슴에 담으며 서로를 배려하는 동행자와의 여행길은 풍광처럼 아름답다. 함께 함을 귀하게 생각하는 우리는, 아득히 위용을 자랑하는 눈 덮인 계룡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즐거운 동반자를 만나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 겨울이 길을 내어주어 나목으로 서 있는 저 나무들에 연녹색 잎새가 돋아 날 즈음, 다시 한 번 여정의 길을 나서자는 약속을 하였다. 기다림은 벌써 시간을 앞서가고 있음인지, 잔설 덮인 산사에서 아름다운 동행을 생각하는 가슴은 얼음장 밑으로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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