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신문연재글)

어머니의 베버선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17. 1. 13. 09:44

어머니의 베버선

                                                                           이시은

버선의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베틀로 짠 무명베 버선이다. 아직도 켤레를 묶은 실을 터지도 않은 상태이지만 누르스럼하게 변한 색깔이 버선의 연륜을 짐작케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서너 해 전 친정에 갔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아 온 버선이다. 어머니께서 시집 올 때 외갓집에서 혼수품으로 가져와 여태 남아 있는 물건들 중에 하나이다. 

 

어머니는 연세가 들어 남은 여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느끼시면서 부터, 내가 친정에 가 있는 동안 가끔씩 어머니의 혼수를 넣어 왔던 함을 내려놓고 뒤적이기를 좋아하셨다. 그 함 속에는 구십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세월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듯 했다. 혼수로 가져와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하고 있던 발 고운 명주필로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수의를 지어 입혀 보내시고도, 아직도 딸을 보내면서 고이 챙겨 주시던 외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혼수품이 몇 가지 남아 있는 함이다.

 

이 혼수품 중에 하나인 베버선은 외할머니께서 장만한 천으로 어머니가 손수 지어 온 것이다. 혼수를 다소 넉넉히 해 온 연유도 있겠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버선이 남아돌아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팔남매 막내로 자라 결혼한 어머니가 첫 딸을 본 후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 평생 간직해 오던 버선을 내게 주고 가신 것이라 생각된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지금 내게도 외할머니를 그리던 어머니의 마음이 절절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살아생전에는 언제고 찾아가면 뵐 수 있다고 생각되어 이토록 가슴 저미는 눈물은 흘리지 않았건만, 이 세상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모습을 찾아 베버선에 얼룩 하나를 더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살아온 길을 발차취라고 한다. 그 만큼 살아가는 일에 중요한 것이 걸음걸이 이며, 몸을 지탱하는 발의 존재를 귀히 여겼음을 의미하는 말 일 것이다.

어머니는 한평생 참으로 부지런 하셨다. 그 부지런함으로 많은 식솔들의 입새나 먹새를 감당하며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해결 해야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날그날 잔일가지들을 하고 사는 것이 여인들의 살림살이 인지라, 한 일은 그대로 이고 하지 못 한 일은 금방 흐트러진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매사에 진중함으로 말을 아끼시고 몸으로 실천하시던 어머니는 당신의 발자취를 생각하며 시집 올 때 마음을 한평생 버선과 함께 담고 살고자 함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도 혼수품으로 받은 연분홍 본견 치마저고리 한 벌이 장롱 속에 자리하고 있다. 마음이 스산할 때면 은은한 분홍빛 속에서 젊은 날의 꿈을 찾아보곤 하지만, 아름답게 여울지는 날보다 시린 가슴 훑어 내리던 세월들이 바람처럼 다가선다. 어머니의 세월들은 아름다움만 출렁이는 봄날이었을까. 물더무에 길러 놓은 물에 얼음이 얼 듯, 얼어붙는 가슴으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이는 날이 하루 이틀 이었을까.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유달리 예쁜 버선을 신고 가시던 어머니 였다. 마지막 입고 갈 옷으로 그토록 예쁜 꽃버선을 장만하시고 기다리심은, 저 세상에서도 당신의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계신 듯하다.

 

어머니의 영욕이 점철 된 빛바랜 베보선과 내가 간직한 한복감 한 필을 간직했다가 딸아이에게 주고 싶다. 내 딸아이도 외할머니의 마음이 담긴 베보선과 엄마의 혼수품인 한복감을 간직하고 그리움과 회한을 비추는 거울로 쓰이기를 바래보지만, 그 아이 가슴에는 어떤 바람이 불어올지......

 

창 밖에 바람이 서성인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안고 사는 욕심일지라도, 거센 바람은 나와 함께 길을 접고, 내 아이에게는 봄날에 불어오는 훈풍이 같이하길 빌어본다.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