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신문연재글)

눈 내리는 날의 소회所懷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17. 1. 17. 21:29

                          눈 내리는 날의 소회所懷

                                                                                                                  이시은

새하얀 눈 덮인 풍경이 아침을 열었다. 밤새 눈이 내려 세상을 단조롭고 아름다운 색채로 바꾸어 놓았다. 겨울이 기다려지는 것은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설경을 맞는 기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 오는 날과 순백의 세상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자란 곳이 눈을 자주 접할 수 없는 남쪽 지방 인 것도 한 몫을 한다.

 

아주 드물기는 하였으나, 어린 시절 눈 오는 날의 기억이 짙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밤새 눈이 내려 문을 열고나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은 너무도 신기했다. 눈부시게 새하얀 색으로 뒤덮인 모습은 나를 들뜨게 하는 신천지 였다.

 

마을 초가지붕은 포근함을 더하고, 담장 위에 쌓인 눈은 직선의 경계를 여유롭게 하였다.소복이 눈을 이고 있는 장독대의 항아리들이, 곡선을 드러낸 몸매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있다. 흰 색이 아름답다고 생각 한 것은 이 설경이 주는 이미지 때문 이었다.

 

눈 내린 아침을 맞는 날은 경이로웠으며, 낮에 오는 눈은 특별한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다. 같은 비 이건만, 비가 오는 날은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고, 눈이 오는 날에는 마당으로 뛰어나가, 하늘 향해 팔 벌리고 눈을 맞으며 강아지와 뒤엉겨 뜀박질을 하였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눈을 맞는 것은, 비 오는 날과는 달리 어른들로부터 밖에서 눈을 맞는 것이 허락되는 특별한 날이었다. 동일체이건만 이토록 다른 감성으로 다가 설 수 있을까. 이렇게 눈처럼 행복을 안겨다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름에 간간이 장사가 마을을 찾아와 사 먹어 본, 아이스케키를 흉내 내며 만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이었다. 눈을 그릇에 담고 설탕을 쏟아 부어 맛을 보는 그 달달함이 아직도 단맛의 진가로 생각되는 것을 어쩌랴.

 

그 진한 눈 오는 날의 그리움이 지금까지 겨울이 기다려지게 하고, 눈 오는 날의 즐거움을 더한다. 연인들이 한 약속이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였던 적이 있었다. 내게 그런 약속을 해 오는 사람 하나 없었어도, 나는 아직도 첫눈 오는 날이 기다려지고, 아침에 바라보는 설경에 가슴이 설레인다.

 

서울에서 신접살이를 하던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춥고 미끄러운 길이 싫어 질 만도 하였건만, 불룩한 배를 안고도 즐겁게 눈길을 걸었었다. 눈을 마음껏 볼 수 있는 해였으니, 그리운 사람을 자주 만날 수 있는 행복 같은 것을 남 몰래 즐기고 있었음이다.

 

오래 전 아이들을 데리고 설악으로 향하는 길에, 서울에서부터 설악에 이르기 까지 온통 설원의 풍경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런 풍광을 다시 맛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설악산 권금성에 올라 바라보는 경관은 장관이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설산들은 같은 옷을 입고 도열하고 서서 자연의 웅장함을 드러내 보였다.

 

세찬 바람에도 팔을 뻗고 절벽에 매달려 선 소나무가 눈길을 잡았다. 저토록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과 싸우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모습이라니...... 옥토에서만 아름다움과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생명을 유지하며 보여주는 그 기상, 그 모습을 숙연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설산의 풍광 속에서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는 모습이다.

 

창밖에 쌓인 눈은 녹아내려 세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있었기에, 새하얗게 채색한 설경이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숫한 문양 속에 나도 하나의 무늬가 되어 살아간다. 가끔이라도 눈처럼 청결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과욕일지라도, 나는 그 욕심을 안고 살아가고 싶다.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