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 수필방

수위 아저씨

청담 이시은 2013. 12. 16. 13:52

 

 

수위 아저씨

                                     이시은


 


"사모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부인도 사회적인 저명인사의 아내도 아닌 내게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희미한 불빛아래 반가운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그는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살고있는  아파트에서 수위를 하던 사람이었다. 새로운 직장을 잡았다는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쓸쓸함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그는 I. M. F가 시작되면서 모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던 어느 날 우리 아파트 통로를 지키는 수위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유달리  친절하였고 정원수를 돌보는 일에서부터 화단 앞 풀베기까지 스스로 일을 찾아 몸을 움직이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오전, 늦가을까지 꽃이  보고싶어 매년마다 출입구 앞 화단에  심어놓은 장미를 진정해 왔던 내가, 시들어 가는 장미꽃을 자르고 있을 때였다.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오는 그에게 꽃이 질 무렵 꽃에서 한 마디 잎사귀 아래를 잘라주면 늦가을까지 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가위를 가져와 함께 장미를 자르던 그는  내게 전직이 은행원이었으며, 동서에게 보증을 서 주었다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집이 압류되고 봉급마저 차압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한때 일류학교 출신들도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은행원, 그 은행에  근무하였는데 그는 경제위기를 맞으며 감원바람을 타고 봉급이 압류된 것이 빌미가 되어 직장에서 밀려난 것이다. 철저하게 보증과 담보를 원칙으로  하여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는 은행원이었으나 어쩌다 거역하기 어려운  보증부탁에 말려들어 직장마저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언제 집을 비워  주어야 할지 모르는  불안함과 과거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전날의 과음 탓인지 술기운이 있어  보이는 날이 잦아졌다. 콧등이 불그스름해 진 날에는 말 수가 더욱 많아 졌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던 말이 생각나 가던 길을 멈추고 그의 말을 들어주곤 했다.


 밤 늦게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올 때였다.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다가와 내일부터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하며,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흘리던 그가 얼마간 보이지 않았다. 유달리 술 냄새가 나던 그날 밤 주민 한 사람과 입씨름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본의 아니게 또 한번 사직서를  내어야만 했다. 평소 친절하던 그를 생각해 안주인들은  연대 서명을 하여  복직을 주선했다. 다시  수위복을 입고 예전과 다름없이 친절히 주민을 돕고  빈집들의 방범에도 신경을 썼다. 그러나 지난 번 일이 가슴에 남아서인지 얼마 후 그는 수위실을 떠나고 말았다.


 타의가 아닌 본인의 의사로 떳떳이 그만 둘 수 있었던 그가 생각날 때마다,  친절하게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허허로움이  묻어나던 모습이 궁금했던 터였다. 영하의 냉기가 옷깃을 스미는 저녁, 희미한 불빛을 등지고 아파트 앞 길가에서 만난 그는 새로운 직장을 잡았다는 말을 전해 주며,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간 내가 그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진정으로 외롭고 힘들 때는  위로의 말조차도 더욱 공허한  마음을 울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자신의 암담한 심정을 털어놓아 봐야 그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들을 뿐이며, 그 위로의 말이 더욱 쓸쓸함을 가중시켰을 때가 한두 번이었을까.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였으면 사정을 알려봐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내게 하소연을 했을까.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던 것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었기를 바래본다. 그의 슬픔이 자신의 잘못에만 기인했던  것이던가. 신용 위주의 사회가 아닌  보증 위주의 금융관행 탓이었으며, 또한 냉정하지 못한 마음과 남을 돕고자 했던 마음과 정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나라의 어려움 때문에 연쇄부도 여파로  피해자가 된 그에게, 따뜻한 얼굴로 마주할 여유조차 없어져 가는  가슴들이, 그를 더욱 외롭게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물어보지 못한 그의  직장이 좀더 그의 자존심을  지탱할 수 있는 곳이기를 바라며 집으로 향하는 발길은 무겁기만 하다.


 지난 날 남편의 사업 실패로 힘들어 했던 내 모습과, 어려움을 헤쳐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남편의 모습이 바로 그의 모습이었다. 


 지난 가을 그가 대신하던 장미꽃 순 자르기를 내년에는 그의 얼굴에 장미꽃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나길 빌며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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