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 수필방

연기 속의 추억

청담 이시은 2013. 12. 16. 12:33

 

 

 연기 속의 추억

                                                                           이시은


 


 추억은 피어나고 있었다.


 누구나 이십 대의 꿈과 그리움이 담긴 노트를  비밀스럽게 간직했던 기억들이 있으리라. 나 또한 센티멘탈한 감성으로 적어놓은  대여섯 권의 두꺼운 노트를 간직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못 견디게 그리운  날에는 가슴을 핥는 아픔으로 노트를  메우곤 했고, 내 이상과는 동떨어진 거리를 주행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통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담겨 있었다. 뜨문뜨문 그리움을 소재로 한 시가 있었고, 꿈을 쫓다 지친 고뇌와 회한이 한숨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으며, 가슴 저미는 그리움도 석류 알처럼 빼곡이 적혀 있었다.
 

십오 년 전 맞선을 보고 서너 달의 만남이 있은 후 우리들은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던 사월 어느 날 결혼식을 올렸다.  뭉개 구름처럼 피어오르던 그리움의 채색화를 송두리째 담아가는 것은 신랑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했다. 며칠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영원한 기억 저편에 곱게 묻어 둔 채, 그 많은 고백들을 불태웠다.

 결혼 초 우리  부부는 시어른과 함께  살았다. 아랫층에는 신랑이  총각시절 사용했던 서재가 있었고, 시부모님의 내실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층에 신혼 공간을 차렸고, 내가 시집 오면서 가지고 온 책과 난으로 서재도 꾸몄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열흘 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신랑이 출근한 후 앞치마를  두르고 총각시절 신랑이 사용했던 아래층 서재를 치우다 관세사 공부를 했던 신랑의 낡은 책을 펼쳐 보았다. 책갈피 속에서 책상  열쇠가 뚝 떨어졌다. 무심히 책상  서랍을 열어 보았다. 이게 웬 일인가! 한 묶음의 편지 뭉치와 서너  권의 노트가 쏟아져 나왔다. 같은 글씨로 보내온 여자의 편지 같아 잠시  망설이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그만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다.

 직감은 적중했다. 옛 애인이 보내온 사연들이었다. 시어른의 병 수발을 해야했던 나는 침실 병풍 뒤에 편지와 노트를 숨겨놓고, 신랑이 퇴근하기 전까지 짬짬이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노트에는 먼저 결혼한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벼랑에서 추락하는 듯한 배신감에 어찌할 줄 몰랐다.  서러움이 한껏 몰려 왔다. 며칠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치 도둑이 장물을 숨기듯이 몰래 숨겨 두었다. 

 창 밖 먼 하늘에 조각달이 쓸쓸히 밤을 지키던 날이었다. 신랑과 나란히 누워있던 이불을 빠져 나와 창문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던 사람의 얼굴이 조각달처럼 잔잔히 떠올랐고,  어미 잃은 송아지의  눈망울처럼 커다란 두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밤잠을 청해야 할 신부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신랑도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섰다. 참았던 서러움이 흐느낌으로 변하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신랑은 왜 그러느냐고 물어 왔다. 차마  당신의 연서를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새  신부들이 자주 느낄 수 있는 친정에 대한 그리움이라 생각한 듯 "처가댁에야 무슨  걱정 있어 우리가 잘 살면 되지……."하면서 두 손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음날 아침에 편지 뭉치와 노트를 아픈 상처를 도려내듯 신랑 앞에 내 놓고 말았다. 눈이 휘둥그래진 신랑은 몇 번이고 편지 뭉치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황당한 얼굴빛을 차츰 가라앉히며 "미안해. 사실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던  거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치웠을 거야."하면서 애써 미안함을 표시하려 했다.  그러나 신랑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신랑이 편지 뭉치와 노트를  들고 슬리퍼를 끌며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 한 구석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 올랐고, 노트를  찢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원수 사이를 흐느적 거리는 연기가 그리움처럼 맴돌고 있었다. 한 편 한 편의 글들을 하얀 연기 속에 날려보내며 눈시울 적셨던 내 모습이, 동행자의 고뇌처럼 신랑의 등 뒤에 함께  하고 있었다.  내 젊은  날 삶의  자취인 절망과,   회한과, 그리움의 추억들이…….
 신랑이 출근한 후 한가로운 시간이면 조촐한 나의 서재에서 상념에 잠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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