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잔영殘靈
이시은
내가 고등학교 이 학년 초여름에 할아버지는 유명을 달리 하셨다.
삼십 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힘겨울 때는 할아버지께서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짙게 남아 있는 할아버지의 인품과 덕망 때문이다. 훤칠한 키에 알맞은 몸매에다 근엄하면서도 인자하셨으며, 남다른 잔정을 가지신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과 함께 언제나 의지하며 따르고 싶은 자상함으로 우리들을 보살피셨다. 나이를 먹을수록 당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처신하셨음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한다. 평소 일상에서 '답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무언으로 가르치신 큰 교훈임을 깨닫는다.
슬하에 팔 남매를 두셨으며 손자 손녀들이 삼십 사 명에 이른다. 이런 대가족을 거느리고도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으셨다. 가족 가운데 불과 네 식구가 살지만 어쩌다 언성을 높일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보시는 것 같아 송구스럽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몸가짐과 처신으로 본보기를 보이셨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일꾼들의 일감을 지시하시고는 식솔들을 살피는 분이셨다. 성실하지 못하고 게으른 것은 부도덕한 사람과 함께 가장 몹쓸 버릇이라고 이르시기도 하셨다.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으셨지만 철저한 유가사상으로 도리의 교훈을 일러 주셨다. 바쁜 세상사를 핑계 삼아 도리에 소홀한 나의 모습을 보신다면 어지신 할아버지의 불호령은 면치 못 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하신 할아버지 슬하였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매우 자유롭게 성장했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개화된 의식과 냉철한 사고에 의한 것이었다. 남아 선호사상이 강하던 당시에는 아들과 딸의 차별이 심했다. 그러나 내가 밝은 성격과 의지를 가지고 자란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딸들을 향한 인격적인 대우 덕분이었다. 여인의 행실을 가르치심에 있어 철저하셨지만 인격과 기를 살려주셨다. 할아버지는 딸에 대한 편견을 몹시 못 마땅히 여기셨다. 똑같이 낳아서 남의 가정에 보내야만 하는 여식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시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잔정이 남 다르셨다. 아버지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몇 없을 때였다. 십오 리가 넘는 길을 산을 넘어 가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데리고 산등성이까지 가셔서 학교 교문을 들어서는 아들의 모습을 보시고서야 돌아오시곤 하였단다.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계속되어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집을 떠나 생활하는 우리 남매들이 버스에서 내려 들길을 걸어오는 토요일이면 항상 양지바른 산등성이에서 기다리셨고, 일요일이면 오리 길을 걸어가 버스를 탈 때까지 지켜보시는 것으로 이어졌다. 우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토록 근엄하시던 할아버지는 손수건을 적시셨다. 할아버지의 잔정은 집을 떠나 생활하던 나에게 언제나 푸근함과 든든함으로 자리했다.
어린 시절 밤에 대소가로 놀러가는 일이 가끔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은 무섭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가 기거하시는 사랑채의 불빛은 나를 지키고 있는 듯 했다. 돌아가신 후에도 의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학 때면 영정이 놓여있는 빈소에 상석을 나르는 일은 즐겁기만 했다. 살아계실 때의 할아버지의 진지상을 생각해서였다. 빈 방을 두고도 빈소 제상 아래서 책을 읽으며 머물곤 했었다. 어린 내가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밤이면, 삼국지로부터 중국 선현들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고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를 알기 쉽게 일러주셨던 생각이 되살아 났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사회 과목에 취미를 갖게 된 것도 할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이다.
친정 나들이 때 아버지가 읊는 시조 창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옛날처럼 할아버지가 사랑채에 계시는 듯 했다. 나의 두 아이들이 서로 부모사랑의 비중을 저울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많은 식솔들에게 고루 사랑을 펴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 올린다.
후손들이 큰 탈 없이 성장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가장 큰 행복이었고 주위의 부러움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행복도 하늘의 뜻은 거역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감기에 걸렸던 것이 오랜 후유증을 보였다. 잔기침이 많았던 할아버지의 병환은 폐에 염증이 생긴 폐농양으로 깊어만 갔다. 가솔들의 편안함을 보며 장수하고 싶어하는 할아버지께 아버지는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업무가 끝나시고는 밤 늦도록 할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다녔다.
삼 년에 걸쳐 몇 차례나 입원과 퇴원을 계속한 끝에 할아버지는 칠십 사세로 세상을 하직하셨다. 생전에 그렇게도 철저하시던 당신께서는 며느리와 직장에 나가는 자녀들을 생각해 삼년 상을 그만 두고 백일만에 탈상을 하라고 이르셨고, 많은 자녀들이 큰소리로 곡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맑은 정신으로 저승길을 가시겠다던 할아버지의 꽃상여는 상제喪制들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받으시고, 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타고 상여꾼들의 소리를 따라 자녀들을 앞서서 평소 외출하듯이 골목길을 나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