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손 흔드는 가슴에는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13. 8. 29. 18:23

 

                      손 흔드는 가슴에는

 

 

 

 

 

                                                                    이시은

 

 

 

 

어머니는 다리를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무척 건강하셨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건강하실 것 같던 생각은 한낱 자식의 바램이요 희망에 불과하다. 팔십 연세이니 몸이 좋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어머니의 체력이 그토록 쉬이 무너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더욱 안타깝다. 몇 해 전 이웃에 놀러갔다 넘어져 허벅지 뼈가 부러지셨다. 뼈가 다시 붙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시다. 겨우 동네 아랫쪽까지 다녀오시는 정도가 최대한의 행동반경이다.

 

친정을 생각할 때나, 다녀올 때면 부모님이 계셔서 항상 든든하고, 지친 마음을 재충전해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마음 속이 아려온다.

 

지난 번 친정에 도착한 시각이 밤 열 한 시가 넘었건만, 양친은 함께 바깥마당에서 이슬을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천리 밖에 사는 딸자식을 맞이하는 음성에는 다소 들뜬 모습이 있어도 좋으련만, 어머니의 음성은 그렇지가 않았다. 팔 남매의 맏며느리로, 칠 남매의 자녀를 둔 당신은 우리들이 따르지 못할 만큼 섬세하고 자상하시며, 자식 간의 이야기도 함부로 하지 않는 분명하고도 사려 깊은 분이셨다. 올케들과 어울려 놀면서 시누이인 우리 자매들이, 고부간의 갈등이 있으면 며느리들의 잘못일 것이라고 농담을 하며 웃어대던 일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신혼 초 어머니는 학업을 위해 멀리 떠나 계시던 아버지와 헤어져 시집살이를 하셨다. 큰 고모와 함께 방을 쓰며 방학 때나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렸다고 했다. 세월은 흐르는 물길 같다고 했던가. 꽃같은 청춘을 서로 그리워하며 사셨던 부모님은, 이제 칠 남매의 자녀들도 다 떠나보내고, 주름골 깊은 얼굴을 마주보며 서로의 등줄을 맞대고 살아가신다. 비교적 건강하신 아버지가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주며 다정히 살아가시는 모습이, 슬프다기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워야하련만, 핑그르 어리는 눈물은 웬일일까. 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잠자리에서 뒤척일 때마다 뼈마디가 저려 외마디 소리를 내신다. 그리도 많은 대소사를 치르며 며칠씩 밤잠을 설치고, 조청을 만들어 강정이며 엿을 만드시던 강건했던 모습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허연 머리카락만 달빛 아래 더욱 희게 늘어져 고단한 숨소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텅 빈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런 모습으로라도 오래도록 사시기를 기원해 보았다.

 

누구나 한 번 왔다 한 번 가는 것이 인생이며, 만남은 헤어짐을 예정하는 것이지만, 부부의 연으로 만나 큰 탈 없이 노년을 맞아 저 세상 가는 날까지 함께 하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렇다 할 효도 한 번 못한 여식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행운을 빌며 이렇게 체취를 느낄 수 있음을 감사하며, 가는 세월을 바라 볼 수밖에…….

 

이틀 밤을 보내고 돌아오는 날 어머니는 아침부터 깻잎을 챙기시고, 아버지는 관상수로 보아오던 울 안 단감나무에서 채 맛이 들지도 않은 풋감을 따서 짐보따리를 만드셨다. 이번 나들이도 바로 집으로 향할 것으로 알고 하셨던 것이다. 차마 여정이 이어짐을 알리지 못하고 나서는데, 어머니는 가장 커다란 석류 하나를 따게 해 짐 속에 넣어 주셨다. 내가 소담스럽게 열린 석류가 곱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함께 했던 느낌을 담아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일 것이다.

 

두 노인은 함께 역까지 바래다 주는 오빠의 차에 보자기를 안은 채 동승하셨다. 정성이 담긴 보따리가 자꾸만 눈길을 붙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들릴 곳이 많고 보니 가져 올 수가 없었다. 사정을 미리 알리지 못했음을 후회해 보았지만, 두 분의 마음을 위로하기에는 이미 늦은 일이었다. 떠나는 여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인 잃은 보따리를 안고 돌아가시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내가 깻잎을 좋아함을 알고 애써 준비하신 것이다.

 

멀다는 핑계로 고작 일 년에 두어 번 다녀오는 딸자식이다. 이런 배웅이 몇 번이나 이루어질 것인지……. 동구 밖에 서서 손 흔드는 모습을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은 것이 나의 욕심인 줄 알면서도, 오래도록 그런 부모님이 보고 싶기만 하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다 올 때였다. 역까지 배웅을 나오신 어머니는 무너져 내린 역사 담장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보이지도 않는 나의 모습을 쫓아 멀어져 가는 열차를 한없이 바라보고 서 계셨다. 서울에 도착해 드린 전화에 헛기침을 하며 "거참, 보내는 뒷모습을 보면 안 좋아서……"하고 말을 잇지 못하시던 말씀이 내내 귓전에 서성인다. 오늘도 오래 전 그 말을 생각하며 가져오지 못한 보따리를 펼치실 것이다.

 

당신의 마음인 석류 하나 챙겨오지 못한 나였다. 어디 부모보다 나은 자식이 있으랴만, 따를 수 없는 작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머리 숙이며, 부끄러움 또한 접을 길이 없다. 나도 이제 몇 년 후면 시집 보낼 딸아이를 가졌건만, 아직도 그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굵게 힘줄이 돋은 힘 없는 손을 잡아 보고 싶어, 창가 가로등 불빛이 달빛처럼 어리는 밤 졸시 "길"을 다시 되뇌이며 어머니 품 속같은 고향의 달밤을 생각한다.

 

 

 

내 고향 밀양

다녀오는 길

 

 

팔순의 어머니는

따듯한 손길 놓고

흐린 눈빛으로

떠나는 내 모습 바라보는데

 

 

어머니 애틋한 표정

가득한 가슴 깊이

산 하나 일으켜 세우고

 

 

산 굽이 굽이 더딘 발길에

저 풀꽃들은

웃는 듯이

우는 듯이

그리도 피었는가

 

 

손 흔들고

뒤돌아서는 어머니 가슴에는

무슨 꽃들이 피었을까

 

 

돌아보면

속살 고운 어머니 웃음

넉넉히 피는

 

 

동구 밖

정든 길

 

 

아슴한 그 길

다시 찾을

날은.

 

   

- 이시은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수록-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전거 / 이시은  (0) 2013.08.29
곶감/ 이시은  (0) 2013.08.29
아이의 뒷 모습 / 이시은  (0) 2013.08.29
모정이 흐르는 강 / 이시은  (0) 2013.08.29
창 넓은 집 / 이시은  (0) 2013.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