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몰리는 퇴근시간 무렵에 버스를 탔다.
한 승객이 핸드폰을 들었다. 누이동생인 듯 한 사람과의
통화내용 절반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상소리를 섞어 큰 음성으로 떠들어 댔다.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 갔고, 한 승객으로부터 “다른 승객들이 편히 갈 수 있게 내려 달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사과를 하거나 잠자코 있기는 커녕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며 무시를 당했다고 펄펄 뛰었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벌여 밀치고 당기기 시작했다.
수 십명의 승객들이 동승하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에 기가 질려서인지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사태가 점점 험악해지자 60대 정도의 남자분이 나서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고, 그래도 소란을 그치지 않던 그는 얼마 후 차에서 내렸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던 그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마음이 편치 않음을 느꼈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즐겨 써 왔으며, 어른들은 그릇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나무라고 꾸짖어서 사회 도덕을 바로 잡았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는 말이 있다. 흥정은 붙여야 서로가 원하는 바를 달성하고, 싸움은 말려야 서로간의 피해가 없음을 말함이다. 언젠가부터 싸움 앞에서 모르는 체 하고 비켜 가기를 잘 해야 자신을 방어하며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팽배해져 있다. 이런 현실들이 우리를 멍들게 하며 가슴 아프게 하는 일들이다.
자유란 무한한 방임이 아니며, 개인주의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제약하여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자신의 자유와 평화를 지킬 수 있음을 누가 모르랴.
공중도덕을 무시하고 불편을 초래한 사람에게 시정을 요구하고, 싸움을 말리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연함마저 용기로 여겨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병술년 새해에는 잘못을 일깨우고, 싸움을 말릴 수 있으며, 자신의 잘못을 수긍하며 사과할 줄 아는 모습들이 많았으면 한다.
이시은/ 시인
[불교신문 2197호/ 1월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