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글동네 · 2
2 · 낙양에서 이루어진 한중 문학 교류 이시은
서안에서 낙양까지
2002년 봄 중국 낙양 주정부, 낙양작가협회. 낙양대학교가 합동으로 한중문학교류대회 초청이 있었다. 그 초청으로 성기조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김용문 문화관광부 예술국장. 문효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심의위원장. 곽문환 펜 주간. 최금녀 시인. 그리고 내가 함께 중국 낙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김포공항에서 이륙하여 서안공항에 내렸다. 낙양대학교에 교수로 가 있던 임성조 교수께서 서안공항까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다.
임성조 교수와 함께 차를 타고 낙양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주변 공사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어 우선 개통을 한 것 같이 보였다. 고속도로와 일반도로를 합쳐 8시간을 달리는 내내 광활한 들판이 이어졌고, 온통 뿌연 황사가 시야를 흐리게 했다. 드문드문 마을이 보이긴 하였으나 저 넓은 땅에 농사를 어떻게 짓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대부분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니 가능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씻지도 않은 듯 꾀죄죄해 보였다.
마을에는 집 앞에 오동나무가 뿌연 먼지를 둘러쓰고 서 있고, 눈에 보이는 나무나 들판에 심어 놓은 농작물도 황사 먼지를 뒤집어 썼기에 뿌옇게만 보였다. 넓은 들판에 있는 언덕에는 작은 굴들이 많이 보였다. 보이는 굴들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궁금했다. 들판이 넓다 보니 농사에 필요한 거름이나 농기구를 보관하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곳이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토굴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농경지에 비해 농가 수가 유난히 적어 보이던 것이 이해가 갔다. 이틀 후 두보 생가를 방문하면서 토굴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마을에는 오동나무가 많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고 사람이 죽으면 그 나무를 관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동나무를 심어 결혼할 때 장롱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과 사뭇 다른 쓰임새였다. 그 동안 보아오던 오동나무에 피어 있던 보라색 꽃이 아니라 거무중충하게 황사 먼지에 색깔이 바랜 오동꽃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깨끗한 산천의 아름다움을 실감했다.
중국의 5000년 역사를 알려면 낙양에 가고, 3000년 역사를 알려면 서안에 가고, 500년 역사를 알려면 북경에 가라는 말이 있다. 낙양은 9왕조의 도읍지였고 중국의 7대 고도이다. 중국을 방문하는 첫 번째 길에 낙양을 방문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공식 방문이 끝나면 서안으로 가서 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수교가 1992년 8월에 이루어졌다. 낙양은 2002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지 않은 곳이라 쉽사리 가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서안과 낙양은 중국 역사의 중심지이다. 중국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넓은 평원을 달려 낙양 시내에 접어 들었다. 시내를 달리는 택시를 보고 놀랐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쇠로 칸막이를 해 둔 것을 보고서였다. 얼마나 치안이 안되었으면 저렇게 하여야 할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가면 여권 도난과 범죄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풍경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제적 격차가 심할 때였다.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표적이 되었던 시절이다. 근래에도 중국 여행에서는 여권을 받아 관리하는 것을 본다.
우리 일행을 초청한 현수막이 걸린 낙양대학교 교문. 韓國筆會(P.E.N) 방문단을 환영한다는 글자였는데 P.E.N의 약자가 P.N,E 訪問団이라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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