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들녘을 달리며
이시은
충남 예산에 갈 일이 있었다. 보통 장항선을 타고 가거나 고속버스를 이용하곤 하는데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전철을 타고 가기로 하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1호선 전철이 천안과 신창까지 연결된 줄은 알지만, 한 번도 그곳까지 타보지 않은 터라 설레임도 일었다.
아침 출근길이라 많은 사람이 승차한 전철에는 수도권 대학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일찍 서둘러 나온 승객들은 대부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지난밤 잠을 설친 피로함이 있었지만, 찬찬히 승객들의 표정과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철이 오산을 지나면서부터 승객들도 현저히 줄어 좌석에 앉은 사람들뿐이다. 넓은 창을 통해 흘러드는 풍경은 벼가 익어가는 황금색과 윤기가 줄어든 잎새들의 푸른색이다. 황금 들판을 질주하는 차창으로 10월의 하늘이 유난히 높푸르고 뭉게구름이 여유롭다.
가끔 열차를 타고 이 길을 오가곤 하지만, 전철을 타고 바라보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열차에서는 좌석들이 눈을 가리는 것과 달리 마주 보는 창이 마치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영상물이 아닌 실상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은 영상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저 멀게만 느껴지던 천안을 지났다. 애당초 천안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탈 예정이었으나, 마지막 역인 신창까지 완주를 해보고 싶어 종착역까지 가보기로 했다. 지공(지하철 경로 무임승차)이라고 놀려대던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지하철 무료 승차 증을 받았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을 떠올리며, 나이가 들었다는 서운함보다 또 다른 시작이라 생각하고 수긍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혜택을 누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신창까지 전철을 타보기로 하였다. 흔히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도 이런 것이리라.
경부선을 타고 이 길을 오가는 것은 오래전부터이다. 최초의 경험은 중학교 때의 수학 여행길이었고, 그 후로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르내리던 일과 친정 나들잇길이었다. 여섯 시간 넘게 열차를 타야 도착하던 부산 가는 길이 이제는 2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ktx가 생겼다. 멀게만 생각되던 충남까지 수도권을 잇는 전철을 타고 달리는 마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의 경제와 국력이 얼마나 신장되었는지 절감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잘사는 나라에 살면서도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불만이 쌓여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신창에서 내려 예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풍경이 아름답다. 태풍이 지나간 탓일까. 간간이 쓰러진 벼들이 보이던 것과는 달리 들녘이 풍요롭기만 하다.
저토록 풍요로워 보이는 들녘에도 비바람에 쓰러진 벼들이 있고, KTX가 달리는 철로 위에도 느리게 달리는 무궁화호도 있다. 굳이 앞서가는 것을 시샘하고 폄하할 일도 아니며, 미진한 것에 불만만 토로할 것도 아니다. 무엇에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늘진 곳이 있기 마련이다. 경로우대의 나이를 살면서 잘 살아온 날과 회한이 있는 날들이 쌓여 오늘을 맞았다. 황금 들녘이 아름답고, 태풍이 지나간 가을 하늘이 청명하고 푸르듯이, 살아온 날에도 아프고 쓰라린 기억들은 접어두고 아름답게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일까. 하늘은 더욱 높푸르고 들녘에는 결실을 키우는 금빛 햇살이 눈 부시다.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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