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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 선생님과 함께한 날들/이시은

청담 이시은 2015. 7. 21. 01:43


 

청하 선생님과 함께한 날들

       -청하 성기조 선생님 팔순에 부쳐

 

                                                                                      이시은


 


청하 선생님의 팔순 문집에 실을 글을 적는 마음이 기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언제나 열정적으로 일 하시는 모습을 오래 곁에서 보아 왔기에, 세월을 잊고 사신다고 생각해 왔다. 팔순이라는 연세를 생각할 때 세월의 흐름에 아쉬운 마음이 들긴 하나, 그간 건강하게 일하실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팔순이란 세월을 남달리 걸어오신 발자취를 생각하며, 남은 여생 동안도 건강하게 일하시고, 문단의 큰 어른으로 길잡이가 되어 주시길 기원한다.


 

청하 선생님과의 인연은 서울시단이 90년대 후반 동숭동 소극장 ‘왕과 시’에서 낭송회를 하던 초창기부터다. 당시 서울시단 회원들은 원로와 중진 시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다 보니 자연히 젊은 내가 선생님의 일을 돕게 되었다.


 

모윤숙 선생께서 만드시고 청하 선생님께서 이사장을 맏고 있는 한국문학진흥재단에는 번역서를 내는 문학진흥재단과 서울시단. 문예운동. 청하백일장. 청하문학회. 청수문학회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서울시단 이었다.


 

내가 한국문학진흥재단 감사와 서울시단 간사로 일하는 동안 서울시단이 탄탄하게 자리 잡아가는 것을 보면서, 미력한 힘으로나마 선생님의 일을 돕는 것을 즐겁고 보람으로 생각 했었다. 동숭동 소극장에서 낭송회를 할 때 서울시단 회원으로 생각나는 분들이 이성교. 신기선. 조남두. 이창년. 정광수. 김지향. 이유식. 임원재. 곽문환. 이기애. 김경수 선생들이다. 일일이 거명 할 순 없지만 서울시단 회원들은 어떤 시단 보다 구성멤버들이 쟁쟁 했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이사장을 지낸 문효치 선생과 현임 이사장인 이길원 선생도 서울시단 회원이었다.


 

품바대장 김시라씨가 운영하던 소극장 “왕과 시”에서 서울시단 낭송회를 할 무렵 이었다. 대학원에 가겠다는 나에게 대학원에 가서 학위를 받는 것 보다 문인이니 글을 열심히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석 박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차라리 대학원 수준으로 강의를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대학 강단이 아닌 곳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최초의 일이였다. 함께 공부할 사람을 찾던 중에 나와 두 사람을 두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문학개론. 문예사조. 문장론. 시창작론과 수필창작론에 이르는 선생님의 강의는 언제나 그 해박하신 식견과 오랜 문단 경험, 그리고 대학 강단에서 다져진 명 강의로 나를 매료시켰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국문학을 전공 하였지만, 문학 원론 강의를 선생님께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행운이었다. 오늘날 내가 문학을 이해하고 나의 문학개념의 뼈대를 잡아주신 분이시다. 선생님께서는 ‘남보다 앞서 가려면 잠 밖에 줄일 것이 없다’고 이르시던 말씀이 귓전에 생생한데, 나는 그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고 있음이 부끄럽기만 하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 시절이라 바쁘신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열정을 다하셨고, 가르치는 일을 즐거워 하셨다.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모임이 청수문학회 였다.


 

자잘한 선생님의 잔일을 도우면서 언제나 스승을 도우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펜 회장을 하시던 시절 펜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게 되고, 행사 진행을 돕다보니 많은 문인들을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내게는 행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오랜 시간 선생님과 함께하며 기억에 남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나,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 낙양대학교와 낙양문인협회가 초청한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한 일이었다.


 

당시 펜 회장이신 성기조 선생님과 문화부 예술국장을 지낸 김용문. 펜문학 주간 곽문환. 펜분과위원장 문효치. 최금녀 시인과 함께 였다. 그 방문 기간 동안 회의석상에서 선생님의 탁월한 교섭능력을 볼 수 있었다. 초청기간 동안 낙양대학교 학장. 낙양문협 회장. 낙양시 정부 부주석이 관계자들과 하루씩 우리 일행과 함께 했다.


 

그 초청에서 방문한 곳 중 두보의 생가에 들어 가 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곳 관의 안내로 아직 공개하지 않은, 두보가 태어 난 동굴을 가 볼 수 있었다. 여섯 평 남짓한 동굴에 들어서면서 청빈하게 살다 간 시성의 첫 울음소리를 듣는 듯 했다. 두보의 묘를 찾았을 때 당시에 세운 초라한 비석을 보면서 가난하게 살다 간 시성의 생애를 짐작하게 했다. 미공개 지역을 특별히 볼 수 있었으니, 두보의 생가는 우리 일행이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방문한 방문객이 아닌가 한다.


 

선생님의 칠순 문집에 이어 팔순 문집에 글을 적으면서 세월이 참으로 빠른 것을 실감한다.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그 간 심혈을 기울이신 문예운동과 수필시대, 서울시단 그리고 청하백일장의 발전을 빈다. 타고 난 건강을 가지신 선생님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처럼 남은 여생동안 건강하시고 나날이 복된 날 되시길 기원한다.


 

2012. 1. 12.


 청하 성기조 선생님 팔순 문집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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