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 수필방

아이의 뒷 모습

청담 이시은 2013. 12. 12. 05:21

 

 

 아이의 뒷모습

                                                   이시은


 

 서둘러 가방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누구나 걸어다니는 모습이련만 내게는 얼마나  대견스러운 모습인지 모른다. 두어  해 전 교통사고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성한 걸음으로 학교에  다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그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다.
 선발고사를 치르는 입시제도 탓에 대학 입시만큼이나 노력을 해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던 아이는 하교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  달이 넘게 병원 생활을 하였지만 퇴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이의 상태는 빨리 완쾌 될 것  같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한 상태로 학교에  보낼 것인지 휴학을 해야 할 것인지 단안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한 해를 휴학한다는 것 또한 쉽사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몇 차례 학교를 오가며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학교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교과목의 진도가 나갔다.  견디다 못해 다리에 쇠기구를 박아 겨우 뼈의 중심을 잡고있는 아이를 싣고 학교로 향했다.
 한 쪽 다리가 부러진 중상을 입고 얼어붙은 빙판 길을 목발에 의지한 채 학교에 가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층 교실을  향해 방금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아이의 모습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한창 혈기가 왕성한 고등학교 일 학년, 그들은 가만히  있기조차 힘든 시기다. 쉬는 시간  복도를 오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천천히 걸어다니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루종일 아이를 보호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목발을 짚고 빙판으로  얼어붙은 화장실을 오가야 하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놓고, 나는 한시도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만일 누구에게 부딪쳐 넘어지는 날에는  다시는 온전한 다리로 걸을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병원생활을 해 오던 아이의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퇴원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태로 추운 교실에서 하루종일 이어지는 수업을 듣고 난 아이는 지쳐 있었다. 성한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시간을 골절된  다리를 내밀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정규수업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다리는 퉁퉁 부어 올랐고 밤 새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든 사이 몇 번씩이나 이불을 접어 다리를 높여주고 살그머니 방문을 닫았다.
 건강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은 접어 두어야만 했다. 어떤 것이 진정 아이를 위하는 길인가 고심 끝에 휴학을 권유했다.  그러나 아이는 극구 반대했다.  정들었던 친구들과 결별하고 후배들과 학년을 같이 한다는 것이 아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 다시  찾은 교실에서 친구들의 우정을 뒤로  한 채, 부모의  설득으로 휴학을 결심하고 짐을 챙겨 와야만  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병실을 찾아주던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급우들을 뒤로하고 학교를 나오는 아이는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나는 인생이란 마라톤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뒤늦은 듯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내심으로 염려했던 것처럼 그간 교우들과 쌓아온 우정의 상실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앞을 응시해 보았지만 눈 앞은 자꾸만 흐려져 갔다. 겨울 내내 바깥 출입조차 하지 못하고 푸석푸석한 모습으로 지내야만 했던 아이는 빛나던 눈마저 흐릿해져 가는 듯했다. 나는 얼어붙은 길을 성한 다리로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빠른 쾌유로 자유로이  걸을 수 있는 모습을  위해 수없이 기도하면서, 그간 잊고 살아온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골절된 부분은 쉽게 접합이 되지  않았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재수술을  생각할 때는 눈앞이 캄캄해 졌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에게 일 년이란 공백은 엄청난 시간이다. 일 년을 휴학하고도 재수술을  해야 한다면, 또 한 해를  휴학해야만 할 일이었다. 명문학교에 속하는 아이의 학교에서는 열흘 간의 결석도 회복하기 어려운 학습과정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오가는 친구들을 보고  있는 아이에게 무어라고  말을 해야할까. 애써 위로를 해 보지만 그것이 얼마나 진정한  위로가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휴일이면 학교 운동장에서 펄펄 뛰며 농구공을 날리던 혈기로  몇 달 간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한 아이에게, 사고 현장을 보고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겼던 마음을 생각하며 위로하곤 했다.
 아이는 긴 투병생활 동안 내게 투정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인내하고 있었을까. 평소 큰소리 한  번 내게 하지 않던  아이에게 차라리 어미인 내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겨울 내내 가슴 조이며 지내던  내게 "자식은 있는 표시를 내는 법이라우……"하며 위로하던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의 말씀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새로운  후배들과 함께 등교하는 길에서도 아이는  여전히 목발을 짚고 차에 실려 다녀야만 했다. 무더운 여름, 안전을  위해 보조기를 착용하고서도 별 무리 없이 학우들과 어울려 가는 아이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신의 축복인지 아니면 아이 스스로의 의지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재수술을 받지 않고 완치되어 농구공을 들고 마음껏 뛰노는  아이의 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언제나 어려운 길목에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많은 염려와 우려 속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갖은 생각을 해가며 예전과 같이 무사하게만 해 달라고 빌었던 내가, 몸 건강히  웃는 얼굴로 학교를 오가는 아이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채근을 해 댄다. 욕망의 자리는 비어있는 곳이 못 되는 것인가. 아이의 사고 현장을  보고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음을 감사해 하고, 마음을 비우려고 애를 쓰며 더 이상의 비극이 없었던 것을 고마워하던 내가, 앞으로는 아이에게 또 어떤 주문서를 낼까.

 

 

(아들아이가 고등학교 시절 교통사고를 당하고 격은 일을 적은 것이다. 성년이 되어 후유증 없이 직장에 다니고 있는 아들과 하늘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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