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 수필방

동창회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09. 10. 14. 22:45


 동창회


                             이시은



 

  특별한 만남을 위해 들뜬 마음으로 밤을 보냈다.
 가물가물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가다 문득 그리움으로  찾아오는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다. 꼭 삼십 년 만에 한자리에 모이는 때늦은 동창회를 위해, 내가 살고 있는 부천에서 밀양까지의 여정에 올랐다.  이런 저런 이유를 접어두고 꼭 다녀오리라는 생각에 열흘 전부터 기차표를 예약하고 기다렸다.


 동창회 전 날에는  밤잠을 설쳤다. 코흘리개  어린 친구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궁금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외모에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되돌아  보면 이렇다할 성과도 없이 흘려버린 날들을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고싶은  생각과, 항상 흠집  투성이인 내 삶의 흔적을 다소나마 눈가림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동창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먼저  도착해 있던 친구들의 얼굴이 늦게 도착한 나에게로  몰렸다. 지나치는 길거리에서의 만남이라면 알아 볼 수 없으리만치 우리들의 모습은 변해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는 하루였다.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차례 수인사가 오갔다. 모두들 나름대로 모양새를 내고 있었다. 모임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어린 시절 평소  말수가 적었던 K가 배시시 웃으며 들어왔다. 조금 뒤 식탁에는 먹음직한 딸기가 수북히 담겨져  나왔다. 밀양 근교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그녀가 가져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딸기를 따오느라 서두른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는 유행이 지난 듯한 바지에다 등산복 같이 포켓이 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다. 컷트 머리가 길어 퍼머끼조차 없었고, 얼굴에는 화장마저 하지 않았다. 


 순간 순모원피스에 가죽코트, 그리고 양말과 가방, 쓰고 있는 모자까지 색상을 맞추어 입은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부끄러움이  몰려 왔다. 곱게 화장을 한  내 얼굴에는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과시욕과, 드러내고 싶지 않는 치부를 은폐하고 싶은 헛된 욕망이 숨겨있음을 깨달았다. 평소 도회 생활에  젖어있던 나는 옷가지가 바뀔 때마다 양말에서 구두까지 색상 조화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옷장이 비좁은 데도 항상 외출 때마다 입을 것이 없다고 느끼며  살아 왔다. 평소 여성의  기본이라고 생각해 온 매무새가 이처럼 부질없는 일로 부각되어 오는 것은, 그녀의 꾸밈없는 순수함이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에 진학조차 하지 못한  처지였지만 생활을 가꾸며 무척이나 성실히 살아온 그녀였다. 두툼한  지갑에서 기금을 내놓지도 않았고,  결코 앞에 나서지도 않았지만,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진정으로  동창들의 만남을 위해 마음 써 온 그녀의 진실이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독 동창들 가운데서 그녀가 눈길을 끄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친밀감을 주는가를 알게 했으며, 진정으로 기쁜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어서였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헤어지기가 아쉬웠던 우리들은 장소를  옮겨 조촐한 여흥이 시작되었다. 서정적인 노래를 하고 있는 그녀는 너무도 당당해 보였다.  도회지 생활만이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듯이 바삐 살아온 나의  지난 날을 되돌아 보았다. 번번이 빗나가는 이상의 잣대를 붙잡고 힘겨워  하며 살아온 날들이었다. 내가  무지개 빛 꿈을 꾸며 회색 아스팔트 위에 구두창을 또각일 때, 그녀는 흙을  일구는 손 안에 작은 행복을 심어 오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귀경길 차창 밖에는 못다 나눈 회포처럼 산자락에 뜨문뜨문 남아있는 잔설이 봄을 시샘하고 있었다. 티 없던 얼굴이  완숙미를 드러내는 중년의 모습으로  만났던 우리들이, 또 이 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는지 궁금했다.

 

이시은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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