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진주 / 이시은
또 다른 진주
이시은
쇼윈도에서 고아한 빛을 발하는 진주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검은 옷이 많은 나는 은은하고 깔끔한 보석인 진주 목걸이와 진주 반지를 무척 아껴왔다. 검은 색의 투피스를 입을 때면 하얀 진주는 으레 나와 함께 해 왔다. 어느 잡지사에서 사진을 보내 달라는 연락을 받고, 역시 진주 목걸이와 반지를 끼고 사진을 찍은 후 다른 패물로 갈아 낀 다음 여러 날 동안 잊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외출 준비를 하며 진주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근래에 와서 더러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일이 잦고보니, 또 나의 건망증이 시작되었나보다 했다. 돌아와서 보관해 두었을 만한 곳을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미치고 보니 하나 둘 의심이 갔다. 어느 곳도 흐트러진 곳이 없었으니 분명 가족들의 소행이거나 아니면 좀도둑의 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중이라면 누구일까. 대학을 다니고 있는 딸아이가 목걸이 하나 골라주지 못한 어미 몰래 멋내기용으로 잠시 가져간 것일까. 아들아이에게는 무슨 용도로 필요할까. 아니면 남편이 몰래 가져가야 할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 그간 내가 가족들의 심사에 소홀히 했다는 자책과 함께 며칠을 생각하고 살펴도 의심할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그저 끼고 다니던 패물을 아무렇게나 뽑아두는 나를 놀려주기 위해 감추어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나는 수시로 열쇠를 맡기는 수위 아저씨를 대상자에 올려놓았다. 평소 그렇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분명히 열쇠를 잘못 보관한 사이 수위실에서 열쇠를 들고 와 누군가가 집안으로 들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을 몰아갔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만 가져갔으며, 그것이 있는 곳을 정확히 알고 물건 하나 흩트러뜨리지 않았는지가 의심스러웠다.
다시 생각은 원점을 배회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무척 불편한 심사로 며칠을 지냈다. 수위 아저씨에게 열쇠 맡기는 일도 그만두었다.
검은 색의 옷가지를 입을 때마다 마땅한 패물이 없어 신경이 거슬렸다. 그것은 남편이 마음을 담아 내게 선물한 것이었다. 수년 동안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사랑해 왔던 물건이라 더욱 아깝고 속상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백화점에 들릴 때면 공연히 보석상 앞을 기웃거리며 내가
가졌던 것과 비슷한 진주에게 눈길을 보냈다. 눈치 빠른 점원은 내게 진주를 권해 왔다.
잃어버린 크기의 진주를 골라 값을 물어 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격은 가슴앓이
를 더하게 했다.
혼자 휑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어차피 잃어버린 진주때문에 더 이상 속상해 하지 않기로 마음을 돌렸다. 남은 패물까지 죄다 도둑 맞은 것에 비하면 그래도 다행이라 여겨졌다. 다시 사면 될 일이다. 공연히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것도 죄가 아닌가. "훔친 자보다 잃어버린 자의 죄가 더 크다"는 말도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서야 마음이 편안해 졌다.
모처럼 집에서 쉬는 날이었다. 밝게 비치는 햇살에 작은 먼지마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걸레를 들고 화장대 위를 닦기 시작했다. 휴지로 화장품의 뚜껑을 하나씩 닦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다 쓰고 무엇을 담을 생각으로 남겨 두었던 빈 화장품 통 뚜껑을 열어 보는 순간 나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굳어졌다. 지난 번에 빈 화장품 통에 그것을 넣어 둔 생각이 났다. 까맣게 잊은 채 화장대를 정리하며 진주반지와 목걸이가 든 통을 무심코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다. 은밀히 보관한다고 화장품 통에 진주를 넣어두었다가 일을 내고 말았다.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의 뒷모습이 이런 것인가 하는 뉘우침이 일었지만 이미 허사였다.
모두가 내 잘못이었다. 나를 슬프게 한 것은 잃어버린 진주보다 무성의한 나의 처사였으며, 늘어나는 건망증이었다. 더욱더 슬픈 것은 죄 없는 사람을 의심했던 나의 마음이었다.
가족과 함께 웃는 얼굴로 외출하는 내게 수위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간 죄 없는 가까운 사람들을 의심하며 스스로 불편해 하고 있지 않았던가. 비록 혼자 한 일이었지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두에게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표현을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나의 실수로 잃어버린 진주 때문에 생긴 의심으로 하여 상처받을 뻔했던 믿음이었다.
말을 참는 의미가 이런 것일까. 믿음이라는 또 다른 진주가 있어 모두 함께 웃을 수 있음이 좋았다.
쇼윈도에서 고아한 빛을 발하는 진주보다 더 고운 빛을 발하는 '믿음'이라는 또 다른 진주를 떠올리며 발길을 옮긴다.
이시은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