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신문연재글)

밀양 수산제 역사공원을 둘러보고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22. 8. 20. 21:50

밀양 수산제 역사공원을 둘러보고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하였다.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뜻이다. 농사를 짓는 것은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으로 해결되어야만 한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하여도,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우선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선이 하늘을 날고, 인공위성이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도 기아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곡물 생산국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여러 나라가 곡물이 유통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적어도 식량만은 자급자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식량이 확보되지 않는 것은 목숨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것은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할 때부터 앞으로의 미래까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에는 물이 필수이다. 물을 이용하기 위해서 제방을 쌓고 수문을 만들어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삼한 시대 때부터 저수지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삼한 시대 저수지였던 밀양 수산제 역사공원을 다녀왔다. 학교에서 단골 문제로 등장하던 가장 오래된 삼대 수리시설 중 하나인 <수산제 역사공원>을 둘러보는 마음은 남달랐다. 삼한 시대 수리시설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 곳이 나의 고향에 있다는 것이 더욱 관심을 가지게하였다. 막연히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곳이었다.

 

 밀양 수산제는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와 더불어 삼한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수산제는 가장 오래된 저수지이다. 수산제는 자연 암반을 뚫어 수문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수문은 AD 330년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의 입석 수문보다 원시적이며, 적어도 2~3세기는 앞선다는 평가도 나왔다고 한다. 수산제 주변에서 돌칼과 4~7세기 토기가 발견되고, 대 규모 패총과 지석묘도 발견된다.

 전시관에서 수산제에 관한 전시물을 보고 공원을 둘러보았다. 초여름 날씨였지만 제법 더운 날씨였다. 함께한 일행들과 그 옛날 수산제를 상상하며 이야기가 이어졌다. 다양하게 꾸며진 공원이었지만, 가장 관심사는 수문이었다. 함몰된 땅 아래에서 수산제의 수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땅 아래 묻혀있던 수문이다. 그 오랜 세월을 간직한 수문을 보면서 나의 시선은 물길이 흐르듯 수문 입구로 빨려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수문을 살펴보았다. 넓은 땅에 벼농사를 가능하게 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수문이 아닌가. 땅굴의 입구처럼 보이는 모습이 그렇게도 대단해 보일까. 이 수문은 밀양문화원 원장으로 지역 문화발전을 위해 애쓰고 계시는 손정태 향토사학자께서 1986년에 발굴하였다.

 

 수산제는 둑을 막아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 (지역에서 안강으로 부름)의 물줄기가 농지로 범람하는 것을 막고, 산으로부터 흘러들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저수지를 이용하여 높은 지대의 농사를 짓는 데 이용하였다고 한다

 수산제는 경상남도지정 기념물 제102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둑의 길이가 728(1,040m)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저수지의 둘레는 20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수문은 높이 181너비 152길이 25m 연결 수로 7m의 규모이다. 배수를 주로 하는 수문과 달리 이 수문은 양수와 배수를 하는 특수한 수문이었다. 저수지에 비가 와서 물이 많이 차면 수문으로 물을 용진강으로 배수해 농지면적을 넓히고, 물이 없을 때는 용진강 물을 저수지로 유입시키는 작용을 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슬람밀양도호부 고적조 기록에 고려 충렬왕 원년(1274)에 김방경이 몽고 군사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제방을 고쳐 쌓고 관개를 하여 군량미를 비축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점필재집에서는 1467(세조13) 체찰사 조석문이 밀양. 창녕. 청도. 창원. 대구. 현풍. 영산. 양산. 김해등 9개 고을에서 장정들을 동원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제방 안은 國屯田국둔전으로 나라에서 경영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였다. 國屯田국둔전에는 저지대에 빗물이 고이는 자연 저수지가 형성되었다. 일제가 수리시설을 만들기 전까지 황토로 만든 둑이 수산리에서 양동리 방향으로 1정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수산제는 농경지로 변했다.

 밀양의 최초 지명은 彌離彌凍國미리미동국’이었다. ‘미동은 우리말로 물동, 물둑(제방)이라는 뜻이다. 변한 12 소국에 속했던 부족국가로 수산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수산은 고향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이다. 수산제가 어디쯤일까 막연히 수산 일대를 생각했을 따름이었는데 <수산제 역사공원>을 다녀오면서 관심을 가지고 수산제의 위치와 용진강의 물길도 알게 되었다. 용진강은 수산에서 시작하여 양동리와 파서리 사이에서 물길을 바꾸어 백산리 방향으로 향했다 세천리 쪽으로 흘렀음과, 수산제의 국둔전은 수산에서 초동면 검암리, 금포리와 하남면 양동리, 귀명리 사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오래도록 머릿속에 잠재해 있던 의문을 풀었다.

 治水치수는 나라의 중대한 治績치적이었다. 하늘은 농민들의 마음을 생각하여 농사에 알맞게 비를 내리지 않는다. 물을 다스리는 지혜는 곧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다. 지금은 댐과 저수지가 많이 있어 농사 짓기가 편리하지만,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했던 그 옛날의 농경지를 생각하며 수산제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오늘날 인공위성을 띄우는 것 만큼이나 대단한 일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그르치고, 비가 많이 와서 농작물이 녹아내린다는 농부들을 생각한다. 물을 잘 다스려 풍작으로 농부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일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수산제에 자생했던 연이 자라고 있는수산제 역사공원을 다시 떠올린다.

 

 

2022. 8.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