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의 풍경 / 이시은
세모의 풍경
이시은
펄펄 눈이 내리는 거리로 나섰다. 앙상한 가지로 서 있던 나뭇가지는 눈꽃을 피웠다. 낙엽을 떨어뜨리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가지마다 새하얀 눈옷을 입고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달력은 한해의 마지막 나날을 하루씩 접어가고, 날씨는 영하의 기온을 이어간다. 거리에는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밝히며, 송년 모임을 하는 손님들로 음식점의 분주한 모습이 십이월의 대표적인 모습이 아닐까.
경제위기를 지내기 전 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넘쳤다. 가계나 찻집이나 레코드를 파는 상점들이 캐럴을 틀어 분위기를 띄웠고, 거리를 걷는 발걸음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러나 IMF를 맞으면서부터 캐럴을 틀어놓는 곳이 줄어들고 크리스마스트리를 해 놓은 곳도 줄어들었다. 이제는 조용하기까지 한 풍경에 익숙해졌다. 심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변화한 풍경은 그 이후로도 이어져 왔다.
변화된 것은 거리의 풍경만이 아니다. 이맘때면 지인들로부터 정성스럽게 보내오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아들고 기뻐했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새하얀 눈밭에서 눈을 맞으며 순록이 썰매를 끌고,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보따리를 걸머진 풍경이다. 받는 즐거움도 크지만, 친구나 지인들에게 보내기 위해 카드를 만들거나 고르는 마음 또한 기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핸드폰이 발달하면서 카드를 보내고 받는 일이 드물어졌고, 이메일이 발달하면서 편지를 쓰는 것이 사라져 간다. 그러나 방법은 달라졌어도 성탄절이나 신년인사를 위한 영상 카드나 메시지가 오가는 것은 여전하다. 정성을 기울이던 것이 줄어들어 아쉬움도 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편리함과 카드를 보내는 비용의 절감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영상 메시지나 카드를 전달할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 이것 또한 급변하는 시대의 한 단면이다.
겨울이면 기다려지는 눈 오는 날이다. 사람들이 뜸한 길을 걸어 쌓인 눈을 밟으며 발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신경을 모아본다. 뽀드득뽀드득 어릴 때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을 걸어 다니며 눈 위에 남는 발자국을 신기해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도 발끝에서 느껴지는 눈 밟는 소리에서 동심으로 느끼던 감각이 살아나는 듯하다.
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내게 보내왔던 카드가 보관된 상자를 열었다. 정성스러운 글씨로 안부와 성탄절을 축하하며, 다가오는 새해의 행운을 비는 글씨들이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멀리 해외에서 보내온 엽서에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연락이 두절 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되돌아보면 많은 사람이 학우로, 직장동료로, 문우로 인연을 같이 했다. 바쁘게 살아가면서 까마득히 잊고 살아오는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고, 곱던 얼굴에 주름이 앉고 머리는 서리가 앉았을 것이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까마득히 잊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 해를 보내는 날짜가 며칠 남지 않은 세모에는 유난히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해가 가기 전에 송년회를 핑계로 만나서 웃음꽃 피우던 얼굴들이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그때 그 모습으로 기억된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겠지만 한 해를 보내는 세모에는 유난히 그리움이 더해온다. 경제가 어렵다는 해다. 모두가 한해를 무사히 마감하고 새해에는 건강하고 복된 날이 되길 기원하면서, 지금은 연락조차 끊긴 스쳐 간 인연들에도 가슴속의 연하장을 띄우고 싶다.
한국문학신문<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