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로 그리는 순천만 / 이시은
수채화로 그리는 순천만
이시은
비가 흩뿌리는 갈대밭 길에 알록달록 우산들이 수를 놓는다. 봄철인데도 전남 일대를 돌아보는 며칠간 장맛비 같은 비가 내렸다. 습지 관람을 위해 갈대숲으로 향해 발길을 놓았다. 갈대숲을 가로질러 놓은 나무로 만든 길이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습지에 조밀하게 서 있는 갈대들이 겨울을 지난 푸석한 얼굴을 하고 군락을 이루어 서 있고, 순이 자라나게 베어낸 곳에 갈대들이 파랗게 새순을 키우고 있다.
가을 갈대꽃이 제격이겠지만, 새순이 돋아나 연녹색 물이 든 갈대밭이 갈색 무리를 이루고 있는 갈대들과 조화를 이루어 가을과는 사뭇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갈대 사이로 습지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물길들이 눈길을 끈다.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니 습지의 생명들이 분주하다. 갈대에 매달린 농게들이 마치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리듯이 발들을 감아쥐고 매달려 있고, 망둥이들이 진흙 속에 자국을 남기고 있다.
연안습지는 생물의 보고이다. 세계 5대 연안 습지로 15만 평에 이른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희귀조류와 천연기념물 조류들이 11종이나 서식하고 있다. 흑두루미. 재두루미. 황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와 도요새. 흑부리오리. 청둥오리. 기러기 등 140여 종의 철새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이토록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은 한번 파괴되면 그 생태계를 완전히 회복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회복하는 데에는 많은 세월을 요한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지 않고, 오·폐수로 뒤덮여 죽어가는 곳이 아니라, 생명이 숨 쉬는 자연의 보고로 보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뿌리에 몸을 싣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고도 스스로 일어서는 갈대를 본다. 흔들리면서도 끝내 자세를 유지하는 갈대다. 그 모습이 닮고 싶어 비를 맞으며 갈대와 같이 너울거리며 걸어본다. 일상의 찌들림을 훌훌 털어내고 바람 부는 대로 온몸을 맡기고 갈대처럼 서 있고 싶다.
넓은 수로를 이루는 갯벌들이 갈대밭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하얀 운무에 휩싸여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고, 갈색과 연초록이 어우러져 옅은 수채화처럼 은은하다.
사진 속에 담아 온 풍경들을 본다. 그날의 시간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시간이 없어 전망대에 오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올라가 보지 못한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순천만의 멋스러움을 담은 사진들을 컴퓨터를 통해 바라본다. 널따란 원형들을 습지 위에 띄워 놓았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이다. 마치 현장에서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젖어 들었다.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배가 된다. 가보지 못한 길이 더 근사할 것 같이 생각되기 마련이다. 가보지 못하고 해보지 못한 것은 더 큰 아쉬움과 미련으로 남는다.
갈대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최대한의 감흥을 안고 돌아오고 싶어 여유를 부려보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했다. 갈대꽃 손짓하며 기다리는 가을을 생각하며 아쉬움을 남긴 채 순천만을 뒤로하고 발길을 옮겼다.
그날의 감흥으로 쓴 시를 적어 본다.
//봄바람 먹고 새순 키우는/갈대밭 개펄은/술래잡기하는 농게들의 놀이터//봄비 내리는 갈대밭 길에/우산꽃 색색으로 피어나고/산자락 감도는 비구름이 부산하다//비옷에 몸 묻고 걸어가며/비가 와서 좋다는 위안이/진정으로 좋은 날//갈대꽃 피는 가을은 저만치 있는데/새순 돋는 봄 갈대밭에서/콧노래를 부른다//
-이시은 시 ‘순천만의 봄’ 전문-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