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신문연재글)

동백꽃에 물들다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17. 4. 20. 16:41

동백꽃에 물들다

                                                                                                            이시은

 

여수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앰블 호텔에서 바라다보는 풍광은 아름답다. 여수 엑스포를 치룬 행사장의 모습들이 보인다. 크고 작은 요트들이 정박하고 있는 모습이 한국의 나폴리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요트 선착장 너머 방파제로 이어진 오동도가 여수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다녀가라는 듯 바다에 몸을 담고 기다리고 있다. 수차례 여수를 다녀왔지만 오동도를 먼발치에서 바라다보았을 뿐이었다.

 

비 내리고 바람 부는 날씨였지만 오동도로 발길을 놓았다. 꽃샘추위가 한창이라 아직 봄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날씨이건만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에는 봄이 익어 가는 듯하다. 바닷바람을 안고 방파제를 걸어가며 돌아보는 풍광도 아름답지만, 섬이 가까워질수록 오동도를 맞이한다는 마음이 설렌다.

 

섬을 오르는 길목을 들어서는 순간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비바람에 떨어져 내린 동백 숲길엔 붉은 빛이 낭자했다. 방금 떨어져 내린 듯 한 동백꽃들이 웃는 얼굴을 하고 길 위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봄 마중 할 채비조차 하지 못한 나에게 타는 듯 붉은 빛을 머금고 피어나서, 온통 꽃빛으로 수놓은 길을 열어놓은 기다림이 아닌가. 이토록 황홀한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었던가! 낙화한 꽃을 밟을까 두려워 빈자리를 찾아 발길을 더듬는다. 남도를 여행 중에 가끔 동백꽃을 만나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숲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꽃으로 단장한 숲길을 걷기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화분에 키운 동백이 모진 겨울 추위를 이기고 꽃잎을 내 밀면, 나도 꽃을 피우기 위해 고초를 같이 한 듯, 얼마나 반갑고 또한 대견하였던가. 얼마간의 눈 맞춤이 있고나면 미련 없이 활짝 핀 모습 그대로 떨어져 내려 아쉬움을 더하던 꽃이 아니었나. 추위를 안고 피는 꽃이라 안쓰러움이 생기고, 시들지 조차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낙화하는 꽃이라 아쉬움이 더하던 꽃이었다.

 

그런 동백꽃이 발자국 옮겨놓을 자리도 없이 길 위에 떨어져 내린 광경은 반가움과 감탄으로 다가왔다. 꽃길에 드러누워 하늘과 바다,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소리를 실어 넘실대고 싶었다. 언제 또 이런 꽃길 위를 걸을 수 있을까. 그저 멈추어 서고 싶은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바닷바람을 타고 내리는 빛줄기는 멈추지를 않았다.

온통 동백나무로 우거진 오동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동백 군락지라고 한다.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수차례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게 하던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동백숲의 진풍경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가 보다. 그치지 않는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걷는 오동도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온전히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였을까! 이토록 여유롭게 만끽 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용이 살았다는 용굴에는 파도가 흰 포말을 이루며 바다의 소리를 전해왔다. 세차게 부딪치는 파도를 어루만지듯 바위에는 하이얀 물거품이 쉬지 않고 돋아난다.

 

내려오는 길에 시누대 숲길을 만났다. 옛 자취들을 지키고 사는 섬지기 같은 나무들이다. 시누대는 이순신 장군이 화살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는데 일역을 한 대나무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고 생각하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오동도는 섬 모양이 오동잎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 섬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는데 고려 말 승려 신돈이 ‘오동나무에 봉황이 깃드는 것을 보고 새로운 왕조가 일어날 징조’라고 하여 모두 베어버렸다고 전해져 온다.

숲길을 내려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깊은 여운이 따라온다. 활짝 웃는 모습으로 낙화해 길손을 맞던 동백꽃의 의연한 모습들이 작은 일에도 연연해하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얼마나 더 살아야 저처럼 의연해 질 수 있을까. 사진 속에 담아온 동백꽃을 보며 쓴 졸시를 적어 보다.

 

 

 

비 오는 오동도 동백숲길엔

동백꽃 비가 내려

붉은 물이 들었네

 

빗방울 헤치며 걷는 나그네

꽃물에 젖어

파도소리 자장가 삼아

동백나무 되었네

 

꽃으로 피는 추억 간직하려

낙화된 꽃송이 머리에 꽂고

마주보고 웃다

사진 속에 들어섰네

 

꽃은 저토록 웃으며

계절을 접고 가는데

 

무슨 미련이 많아

아름답게 떠나가는 낙화마저 품어 안고

언젠가는 버리고 가야할 추억을

바람 한 올까지 꿰매고 있네

 

 

-이시은의 시 동백꽃 전문-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