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낙산사 / 이시은
다시 찾은 낙산사
이시은
궁금함이 많을수록 그 곳을 찾은 소감은 각별하다.
동해안을 찾을 때 마다 낙산사를 찾곤 했었다. 낙산사는 관음성지로 깊은 산 속 산사와는 달리 바다에 접해있는 사찰이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송림과 더불어 찾을 때 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곳을 즐겨 찾는 이유였다.
여러 차례 벼르다 갑갑한 심정에 마음도 비울 겸해서 등산 가방에 최소한의 옷가지와 짐을 꾸려 혼자 여행길에 올랐다. 칠 일 간의 여행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것이 낙산사였다. 애당초 낙산사에 들렸다 설악동에서 하루를 더 묵고, 설악산 구경을 하고 갈 예정이었으나 스님의 권유로 낙산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낙산사는 200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었다. 거침없이 타오르는 화재 현장을 텔레비전으로 바라보며 천년고찰이 화마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가슴 아파 했다. 그러나 내내 가슴속에 궁금증이 일었지만 다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낙산사에는 의상대사가 관음을 맞이하기 위해 목숨을 건 기도를 올렸다는 홍련암이 있는 곳이다. 경포비치호텔에서 의상대를 거쳐 홍련암에 이르는 길은 소나무와 더불어 자아내는 풍광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과 함께 시원스럽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소나무 가지 끝에 머무르면, 한 폭의 그림이며 한 곡의 경음악이다.
나는 이번에도 이 코스를 통해 낙산사를 접했다. 지난 날 송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의 소나무 숲은 찾을 길이 없고, 겨우 화마를 비킨 몇 그루의 소나무들이 바다를 지키며 길손을 맞고 있을 뿐이었다.
만감이 교차되는 생각을 안고 의상대에 올랐다. 망망히 바라다 보이는 동해바다는 겨울 날씨임에도 잔잔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자연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림일까. 성난 파도라도 몰아치면 오랜만에 찾아 온 길손의 감추어진 아픈 가슴을 때려 눈물이라도 쏟게 할까 배려하는 듯, 잔잔한 물결과 부드러운 바람을 안겨다 주었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서울을 떠나 여행길에 오르면서 터질 듯 답답한 가슴을 안고 떠나오지 않았던가. 비우고 내려놓고자 굳이 혼자 떠나온 여행으로 동해안을 따라 코스를 잡았고, 화마에 아낌없이 몸을 내어 준 이곳을 찾은 것 아니던가.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심한 충격에 시달릴 때가 있다. 그런 충격은 나를 여행길로 내몰았고, 바다와 산과 강과 더불어 충격의 불씨를 가라앉히고자 수행하는 마음으로 떠나 온 길이었다. 본래 내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내 몸마저 내 것이 아니라고 했건만, 나는 왜 이토록 나의 인연에 연연해하는 걸까. 평소 법정스님의 삶을 무척 동경해 왔지만 속세에 몸을 담고 살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속인일 뿐이다.
무슨 인연법에 이끌림인지 나와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건강과 소원성취를 빌며 기와불사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길 생각으로 복원작업이 한창인 절터를 지나다 우연히 스님과의 만남이 이루어 졌다. 스님의 권유로 낙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은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초면이었으나 법정스님의 글을 즐겨 읽는다는 나에게 법정스님의 새로 출간한 책 “아름다운 마무리”를 건네주고 침방을 안내 해주던 법만 스님 덕분이었다.
정월 열엿새 밝은 달을 의상대와 홍련암에서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러하듯 아무도 다가 올 일을 모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인데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다.
검은 융단 같은 바다위에 만월의 은은한 달빛이다. 달빛이 깊은 바다로부터 천천히 다가서서 소나무 잎새에 머물러 도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잔 바윗돌에 부서지는 파도에 감길 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아지경. 한없이 내려놓고 수없이 용서하리라는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 잔물결로 차올랐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던 성난 가슴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자연의 모습과 소리들이 부처였고 불심이었다.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과 마음이 맞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함께 침숙 하던 보살님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분이라 함께 달구경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밤늦도록 나누었다. 하룻밤을 단 둘이서 의기상투하여 대화를 나눈 사이라면 연락처라도 주고받을 만도 하련만, 통성명도 없이 아침을 먹고 일주문을 나선 우리는, 손을 맞잡고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눈 채 각자의 행선지로 발길을 옮겼다. 마음속에 비우고 내려놓고자 하는 마음이 서로에게 있었음을 대화 속에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우고, 내려놓고, 한없이 낮아지고자 가슴 쓸어내리며 망망한 동해 바다 넓은 가슴에 안겨 부서지는 달빛에 영혼의 자리를 깔던 나는, 진정 얼마나 아름답고 넉넉한 가슴으로 내일을 열어갈지 모르지만, 내게 다가서던 순수로 빚은 작은 감성 하나라도 안고 살고자 노력해야겠다.
이어지는 여정을 위해 발길을 다음 목적지로 향했고, 또 하루의 날이 과거 속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수필시대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