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이시은 2013. 12. 12. 11:24

 

 마중

                                                                                            이시은


 


 설레이는 가슴으로 창가에 다가섰다.
 거실 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보며 사촌동생 가족의 모습을 찾고 있다. 미리 알려준 도착 시간을 벽시계로 가늠해  본다. 페어글라스로 차단된  아파트 안에는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고, 외부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뭇잎의 흔들림만이 바깥 날씨를  가늠케 할 뿐이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들을 살펴보던 시야에, 뽀오얀 먼지를 일구며 달려오던 완행버스의 모습이 다가 오는 듯 하다. 문득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혈육을 마중하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함께 연상되었다.
 오늘따라 마중이라는 단어가 유달리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것은 기다림이 가져다 주는 추억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생신 날이나  명절에는 고향을 떠나 살림을 하던 작은집 식구들이 모이는 날이다. 며칠 쯤 오겠다는  편지가 그들의 도착을 예고하는 유일한 전갈이었다. 그런 날이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오 리나 되는 시골길을 따라 마중을 나선다. 하루 해를 겨냥할 뿐  몇 시에 도착한다는 예정도 없는 마중이었다.
 열 살 전후의 나로서는 평소 자주 다니지 않던  오릿길이나 되는  국도까지의 거리는 먼 거리였다. 논길을 따라 걸어가다 낯선 사람들이 지나칠 때면  무서움이 더해왔고, 빤히 바라다 보이는 정류장은 그림 속의  원근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마음은 걸음을 재촉했고,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도로 가에서 마냥 서성이게 했다.
 하루 고작 몇 대의 버스가 오가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된다. 들판 가운데 자리한 정류장에는 버스 표를 파는 주막집만 초라하게  서있을 뿐, 쌩쌩 대며 불어오는 바람결은 차갑기만 했다. 주막의 처마를 의지하고 서서 버스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차량의 엔진 소리가 들려오면,  고개를 길게 빼고 느릿느릿 고갯길을 넘어오는 버스를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바라보았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면 바싹 다가가 버스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눈  여겨 보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밀양까지 먼 거리를 와야하는 작은집 식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 리나 되는 먼길은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도 시간을 맞추기는  쉽지 않는 일이다. 하물며 날짜만 지정되었을 뿐, 전화 통화마저 안 되는 마중 길은 오직 보고싶은 마음만이 기다림을 지탱하게 해 주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몇 명의 승객마저  싣고 부릉대며 버스가 떠나갈 때면,  희뿌연 먼지만 바람결에 날릴 뿐, 그리운 모습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저만큼 산 모룽이를 돌아 사라져 가는 버스에서 눈을 돌리며 또 다시 다음 버스를 향한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몇 대의 버스가 지나가고 나면 해는 서산마루를 넘고 있었다. 외딴 주막에도 인기척이 드물어지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올 때 쯤엔 기다림은 초조함으로 변해 갔다. 어둠이 내린 길을 마지막 버스에서 하차한 얼굴도 모르는 길손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들녘을 스치는 바람결은 매섭게 불어오고, 혼자 돌아오는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지친 몸으로 돌아온 집에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몸이  데워질 무렵에야, 동구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버스 통행 시간이 지나서 열차가 도착한 작은집 식구들이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오는 신호이다. 오빠와 언니를 따라 동구 밖으로 향했다. 마중 길에 손을 잡고 오리라고 생각했던 귀여운 사촌 동생이 작은 어머니의 품에 잠든 채 안겨있었다.
 골목길을 걸어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잠에서 깨어난 동생이 비로소 생기를  되찾았다. 가족들이 둘러앉은 방안에서 재롱을 피우는 동생이 보고싶어 점심도 거른 채 온종일 정류장을 배회하며 기다리지 않았던가. 동생의 고사리  손이 나의 손을 이끌며 조잘댈 때면 피로함도 사라졌다.
 그 동생이 결혼을 해  내가 기다리던 사촌 동생만큼  자란 아이와 함께  오는 것이다. 세월이 변한 만큼 마중하는 내  모습도 변해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 그들이 나타나길 기다리다가, 포장된 길을  따라 그들이 탄 승용차가 나타나고 웃는 얼굴로 들어서는 그들을 맞이했다.
 이토록 편안한 기다림이건만, 온종일 기다림에 지친 지난 날의 마중이 그리워진다. 바쁘다는 이유와, 통신의 편리함으로 점점 사라져 가는 마중 길에서 얼마나 많은 정을 자아내게 하였던가. 비록 허사로 끝났던 마중이었지만 온종일 기다림으로 충만해 있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이 다음에 내가 친정에 갈 때 어린 조카들이  천진스런 눈빛으로 동구 밖에서 기다려 줄 것을 기대해 보는 것은 나만의 바람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