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 수필방

오랜 친구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10. 7. 3. 15:22

 

 

 

 

                                          오랜 친구

 

                                                                                    이시은

 

 

 일탈을 꿈꾸며 철새처럼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상의 지루함과 마음의 어수선함을 털어 내고자 떠난다면, 낮 설고 물 선 곳으로 향해 발길을 놓아야하겠지만, 웬 연유인지 오래 전부터 친숙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해운대는 산촌에서 자란 내게 너무도 생경한 모습으로 다가오던 곳이다. 여고시절 처음으로 해운대에 가 보고 바다를 알게 되었다. 바다는 오밀조밀한 산촌의 풍경과는 달리 광활함과 변화무상한 출렁임이 함께 하는 곳이었다. 사람은 첫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첫사랑을 못잊는 것처럼 내가 바다를 처음 만나 바다의 품에 안기곤 하던 곳이 이 해운대이고 보면, 이곳으로 발길이 닿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시내로 향했다. 광복동. 신창동. 국제시장. 너무 오랜만에 찾은 곳이다. 흘러간 세월이 수십 년이 지났건만, 오랫동안 정든 이를 만나는 것처럼 이내 낮 익은 모습으로 다가선다. 예전에 이곳을 누비고 다니던 추억들이 영상으로 뇌리속에 스쳐갔다. 이어질 여행길을 위해 등산가방 하나를 사서 돌아가는 길에 시내 구경을 할 겸 좌석버스를 탓다.

 

 버스에는 부산으로 여행 온 듯한 일행들이 함께 올랐고, 내 옆에는 인상이 곱살한 여인이 자리를 잡았다. 불빛아래 스쳐가는 풍경은 오래 전 기억을 더듬게 했고, 나는 20대의 여인이 되어 차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간을 지났을까. 광안대교의 모습이 눈을 사로잡았다. 목적지가 가까워 옴을 느끼고 여인에게 내가 숙박 할 호텔 앞에 차가 서는지 물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광안대교를 여러 번 보았으나 드라이브를 해 보지 못했다는 말에, 그녀는 해운대에서 자기차로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다고 제의 해 왔다. 혼자 떠난 여행길에서 초면의 사람으로부터의 제안은 선뜻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곱살하고 선해 보이는 젊은 여인의 제의에 동의를 했다. 광안대교를 거처 동백섬을 함께 돌고 남편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가야한다는 그녀를 보내면서 감사하고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만남은 우연에서 시작되어 때론 필연으로 연결되어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함께 하기도 하고, 필연으로 여겨 온 인연이 우연한 일로 단절되기도 한다. 우연이 필연으로 연결되는 만남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 오지만. 필연으로 여겼던 만남이 우연한 일로 단절되는 일은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어찌 이토록 복잡한 세상에 만난 인연을 아름답게만 유지 할 수 있을까 마는,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마음이 여린 나는 내게 맺어진 인연은 오래도록 유지되길 바라고, 가슴 아픈 이별은 비켜가길 기원한다.

 

 오래 전 풋풋한 처녀시절 잡아도 잡아도 손끝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이상과 꿈의 끄나풀을 잡고 힘겨워 했었다. 멀어져 가는 현실을 이기기 위해 이 바닷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때는 내가 꿈꾸는 일들이 성취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것이 그토록 아픔으로 여겨졌고, 그 아픔의 자리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두 번째 행복한 사람은 좋은 배우자를 가진 사람이며, 세 번째 행복한 사람이 좋은 친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며, 평생 좋은 배우자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살면서, 내 모두를 내 보이고 함께 길을 가는 친구가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난 날 해운대 조선비치 호텔 커피숍과 해운대 바다는 내게 좋은 친구였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라이브 음악을 들으면서 바라보는 모래사장에는 쉬지 않고 파도가 밀려들었다. 나는 많고 많은 가슴속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고, 파도는 하이얀 포말로 대답해 왔다.

 

 과욕을 부린다고도 하지 않았고 허욕을 부린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묵묵함 끝에, 철썩하고 그 두터운 손으로 나의 등을 다독여주 곤 하였다.

만월의 달빛이 내리는 바다에 이십대가 아닌 지천명의 길을 가는 여인으로 내가 서 있다. 그 때는 앞으로의 이상에 대한 갈등으로 끓는 가슴을 식히려 했지만, 지금은 내게 엮어진 인연의 고리에 대한 갈등을 풀어 놓는다. 세월의 흐름만큼 갈등의 원인은 달라졌지만, 가슴 조여오는 고통을 안고 말 없는 파도를 잡고 함께 부서지는 일은 같은 색깔을 띄고 있다.

 

 바다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다가선다. 하이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바다는 그대로인데 변한 건 나였기에 발길은 나도 모르게 오랜 친구를 찾아 이곳으로 향했나 보다.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만월의 달을 품고 넉넉한 호흡을 하고 있다. 커튼을 걷고 오래도록 바다의 품에 안겨본다. 빈손으로 돌아 온 나를 오랜 친구로 맞아주는 바다가 있음에 행복하다.

 

 허물로 얼룩진 삶의 모퉁이 길에서, 허황하고 빈자리에 끝없이 바다를 채우며 좋은 친구는 사람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2009. 2. 20

( 수필시대 2010년 7/8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