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 수필방

스키장 풍경 / 이시은

청담 이시은 2008. 2. 28. 14:49

 스키장 풍경

                                                                     글 / 이시은

 


 스키장의 밤 풍경이 환상적이다.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받으며 새하얀 슬로프를 따라  눈을 가르며 내려오는 스키어들의 모습이 신비스럽다. 조금 전까지 내가 저  눈밭에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숙소인 콘도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니 피곤함이 가시는 듯 하다. 스키를 타는 동안에 느낀 스릴과 즐거움과는 달리, 점점이 내려오는 스키어들과 낮게 깔려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가 불빛과 어울려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눈밭을 지치며 눈보라를  일으키는 상급코스  스키어들의 유연한 몸놀림이  아름답다. 그들이 저토록 멋있게 눈을 지치고 있음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건 숙련된 기량을 보이기까지는 남 모르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초보자 코스에 눈길이 머물렀다. 며칠 전 스노우보드를  타는 사람과 부딪쳐 부상을 입고 죽은 듯 실려 내려가던 학생이 생각난다. 가끔 초보자와 동행할 때는 초보자 슬로프에 오르는 일이 있다. 눈 앞이 아찔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금새라도 뒤에서 덮쳐올 것같은 생각에 앞을 주시하면서도 등 뒤에서 눈 지치는 소리에 귀를 곤두세운다. 브레이크를 제대로 걸지 못하는 초심자들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느닷없이 나타나 넘어지고,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그들의 방향을 예측하기란 쉽지가 않다. 스노우보드를 타는 사람들은 더욱 경계의 눈으로 살펴야만 한다. 기술이 연마된 상급자들이야 서로를 피해 가는 숙련된 기술이 있지만 초보자들에게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초심자 강습마저 받지 않고 슬로프에 올라온 사람들과, 친구들을 따라 무작정 스노우보드를 타고 있는 젊은 학생들이다. 스키장에서는 활강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는 사람 중에는 스키 선수들의 활강을 흉내내며 가속으로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만약 자신의 몸마저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과속으로  넘어지는 날에는 자신이나,  부딪친 사람이나 심각한 상처를 입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 행위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이다. 스키장에는 반드시 남과 더불어 스키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더러 있다. 용기라고 보기에는 차라리 만용이며 무지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방학을 맞아 처음 스키장을 찾은 사람과  동남아 등지에서 관광을 와 호기심에 리프트를 타고 올라 온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위험에 대한 경각심과 예비코스를 익혀 안전을 기하기보다는, 서두른 마음에 남들이 하는 것은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 때문이다.


 초보자 코스에서 사고가 많은  것은 중심 잡기가 어려운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탓도 원인이겠지만, 무기와 같은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함께 타게 하고있는 스키장의 상술도 한 몫을 한다.


 두 사람이 엉키어 넘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초보자 코스를 탈 때 내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 스키를 선물 받고 스키장에 갔을 때다. 부스를  신은 다리는 쥐가 날 정도로 옥죄였고, 무겁기 그지 없는 스키를 신고 움직이기란 힘들기만 했다. 연 삼  일 동안 계속되는 초심자 강습기간 동안 플레이트는 겹치기가 일쑤였고, 중심이 흐트러져 넘어지지 않으려고 폴을 짚어대면, 가속이 붙어 더욱 심하게 넘어질 때가 많다. 브레이크를 걸고 중심을 익히는 것만큼 자세를 낮추고 팔을 짚지 않은 상태로 옆으로 넘어지는  기술을 먼저 익혀야 심한 부상을  피할 수 있다.  스키를 벗고 신기도 어려운  초심자가 'A'자 브레이크를 익히기까지 엉덩이가 멀쩡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스키강습이 끝나고 A자 브레이크를  이용해 초보자 코스를  완주할 무렵이었다. 어느 남학생의 돌진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미안해하며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를 일으켜 주겠다고 했다. 그의 마음이 고마워 손을 잡고 일어나 중심을  잡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중심을 잡지 못한 그가 나의  스키를 차며 넘어졌다. 외마디  소리와 함께 심한 통증이 왔다. 자신의 무게까지 싣고 주저앉으며  플레이트 날을 옆으로 세운 채,  날 위에 나를 짓눌러 버린 것이다. 허벅지에 계란보다 큰  딱딱한 부기가 두꺼운 스키복 속에서 잡혔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무릎까지 흘러내리는 시뻘건 피멍 때문에 두 달이 넘도록 스커트를 입지 못했다.


 스노우카가 달려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가벼운  부상이길 빌었다. 초심자들이 유연한 몸놀림으로 미끄러지듯 유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상급자가 되기까지는 적잖은 노력이 따른다. "조심성은 지나치지 않다"던 학창시절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언제나 서두르는 가운데서 사고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사고는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후유증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앞서가는 마음을 누르고  한 걸음 더 높은 곳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노력과 인내가 우선 되어야 더욱  더 즐거운 시간이 기다릴 것이다. 흉하게 번져가던 피멍 자국이 생각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험을 조장하였을까. 초심자 때의 조심성으로 슬로프에 오를 것임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이시은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수록